러시아가 강제병합한 크림반도에 있는 도시 세바스토폴에서 4일 열린 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 예행연습이 열리고 있다. 경례를 한 남성이 탄 T-34 탱크는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의 주력 전차였다. 타스 연합뉴스
러시아가 9일 ‘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승리의 날)을 맞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어떤 입장을 밝힐지를 두고 엇갈린 관측들이 나오고 있다. 일부에선 ‘승리 선언’ 뒤 군사작전을 끝낼 것이란 기대를 내비치지만, 확전의 길을 택할 것이란 우려도 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서구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우크라이나 서부의 철도 등을 폭격했고, 동부 돈바스에선 진격을 이어갔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4일 아조우해에 면한 요충지인 마리우폴을 점령한 러시아군이 폐허가 된 시가지에서 군사 행진 등을 하려고 준비하는 모습이 관측되고 있다고 밝혔다. 페트로 안드류시첸코 마리우폴 시장 보좌관은 “점령군들이 ‘드라마 극장’을 포함한 시내 중심지에서 건물 잔해들을 해체하고 철거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며 “군사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군사정보당국은 러시아가 마리우폴을 이른바 ‘승리의 날’인 9일을 기념하는 행사장으로 바꾸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고 말했다. 승리의 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이 항복한 날로, 러시아는 매년 이날을 기념해 대규모 행사를 치른다.
이날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영상을 보면, 마리우폴의 극장 밖에 버려진 차량과 부서진 건물 잔해 속에서 이를 치우려는 요원들과 불도저가 콘크리트 더미 사이를 오가는 모습도 보인다. 안드류시첸코 보좌관은 “치우는 작업에 주민들도 동원됐다. 이들은 노역에 참여하고 먹을 것을 받았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이날 내놓을 메시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미국 국방부 고위 당국자는 2일 브리핑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추진하는 러시아의 노력이 “빈혈” 상태라며 “그들은 승리를 선언하고 군대를 철수해, 우크라이나가 다시 (철수한 지역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어, 지난 2월 말 개전 이후 러시아군을 괴롭혀온 여러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며 “형편없는 지휘·통제, 사기 저하, 기대에 못 미치는 보급 등으로 러시아군이 고통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러시아가 승전 기념일에 종전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친밀한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에게 들었다고 최근 이탈리아 신문 <코리에레 델라 세라> 인터뷰에서 밝혔다.
정반대 예측도 있다. 벤 월리스 영국 국방장관은 푸틴 대통령이 9일 우크라이나에 공식적인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지난달 28일 <엘비시>(LBC) 라디오와 한 인터뷰에서 “푸틴 대통령은 아마 승전 기념일에 ‘우리는 지금 세계의 나치와 전쟁 중이고, 더 많은 러시아 인민들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며 공식 전쟁을 선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푸틴 대통령은 2월 말 시작된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돈바스 지역 내 러시아계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 군사작전’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월리스 장관의 말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선전포고’를 하고 군사행동의 폭을 넓힐 것이란 의미다.
4일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철도와 전기시설 등을 노린 공습을 이어갔다. 서구의 군사장비 등이 돈바스 지역으로 이동하는 보급로를 끊으려는 시도로 추정된다. 동부 돈바스에선 두 나라 군 사이의 치열한 힘겨루기가 진행 중이다. 러시아군은 도네츠크주의 슬로우얀스크와 크라마토르스크에 공세를 집중하는 모습이다. 얼마 전 이줌을 점령한 러시아군이 돈바스를 방어하는 우크라이나군을 포위해 고립시키려면 이 지역을 돌파해야 한다. 하지만 미군 정보당국은 러시아군의 작전이 아직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리우폴에서 북진하는 병력은 벨리카노보실카에서 우크라이나군의 저항에 막혔고, 이줌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오는 병력은 이제 슬로우얀스크 공략을 준비하는 등 진군 속도가 더디다.
정의길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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