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화상연설을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갈무리
“우크라이나는 우리 영토를 훔치려 한 것에 대한 처벌을 요구한다. 수천명을 살해한 것에 대한 처벌을 원한다. 우리의 여성과 남성을 고문하고 이들에게 굴욕을 준 것에 대한 처벌을 바란다.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전세계에 파괴적인 혼란을 가져왔다. 이에 대한 처벌을 요청한다.”
21일(현지시각) 제77차 유엔총회 일반토의 연설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거듭 강조한 것은 지난 2월 말 끔찍한 전쟁을 시작한 러시아를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26분에 걸쳐 영어로 진행된 화상연설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처벌’이라는 단어를 무려 19번이나 사용하며 자신의 의지를 거듭 강조했다.
지난 7개월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큰 고통을 받은 우크라이나인 입장에서 가장 큰 처벌을 받아야 할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었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평화를 원한다. 유럽은 평화를 원한다. 세계도 평화를 원한다. 전쟁을 원하는 유일한 이가 누구인지 우리 모두 봐왔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처벌해야 우크라이나와 세계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였다.
이 연장선상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평화를 위한 5개의 전제조건으로 △침략에 대한 처벌 △인명의 보호 △안전과 영토의 회복 △안전보장 △자위에 대한 결의 등을 언급했다. 구체적인 처벌 내용으로 러시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누려온 ‘거부권 박탈’, 러시아 시민들의 ‘비자 제한’, 러시아의 침략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정 설치’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전세계가 관심을 기울이는 협상에 대해선 “러시아는 진정한 협상을 겁내고 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한다. 이는 압제자와 테러리스트들의 특징”이라며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이날 강경 발언에서 잘 드러나듯 우크라이나는 개전 초인 지난 3월 말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진행됐던 평화협상 때보다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더 높인 상태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지난 13일 공개한 ‘안전보장’에 대한 제안 내용을 보면, 3월 말 협의 내용에서 큰 변화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는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유럽·튀르키예·러시아 등이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13일 안에선 조약 체결국에서 러시아를 제외했다. 또 3월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단념하는 중립화에 동의했지만, 이번엔 안전보장 조약이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할 때까지 적용되는 ‘잠정적’인 것이라는 내용을 넣었다. 또 조약의 적용 범위도 3월과 달리 크림반도와 동부 돈바스 지역까지 포함시켰다.
하지만 현실적인 국제 관계의 힘의 균형을 생각할 때 푸틴 대통령의 처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의 요구가 즉시 수용될 가능성은 없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협상 대신 서구의 군사 지원을 받아 전장에서 러시아를 패퇴시키는 해법을 추구하기로 뜻을 굳힌 셈이다.
이 경우 큰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러시아의 ‘핵 위협’이다. 우크라이나 고위 관료들은 푸틴 대통령이 거듭 입에 담고 있는 핵 위협에 맞서 서구 핵보유국들이 더 강력한 의사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최측근인 미하일로 포돌랴크 대통령 수석보좌관은 이날 영국 <가디언>에 “다른 핵보유국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등) 외국 영토에 핵 공격을 감행할 생각을 하는 순간 러시아의 핵발사장을 파괴하기 위한 신속한 보복 핵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매우 단호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리나 베레시추크 우크라이나 부총리도 “(러시아가 핵을 쓸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러시아에 대한 확고한 최후통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지하고 명확하게 표현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미향 길윤형 기자 aroma@hani.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