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현지시각) 핀란드 수도 헬싱키 도심에 있는 방공호 내부 모습. 지하 약 20m에 마련된 이 방공호는 평시에는 체육시설과 주차장 등 시민들의 일상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헬싱키/노지원 특파원
1년 전인 2022년 2월24일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한겨레>는 이 전쟁으로 전후 70여년 동안 유지된 안보 태세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는 유럽 나라들을 찾아 이들의 변화를 세차례에 나눠 살펴본다. 북유럽의 오랜 중립국인 핀란드와 스웨덴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결정했고,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소국인 발트 3국에는 서방의 군대가 전진 배치됐다. 미국과 나토의 안보 우산 아래 숨었던 독일은 “시대 전환”을 공표하며 전후 70여년 동안 자제했던 ‘군사력 강화’라는 새 길을 걷기로 했다. 1화에선 핀란드의 결단과 이 전쟁의 ‘핵심 쟁점’인 영토 문제를 둘러싼 엄혹한 현실을 소개한다. 편집자
<우크라이나 전쟁 1년, 유럽을 뒤바꾸다>
1회 북유럽, 중립 노선을 포기하다(핀란드)
2회 발트 3국, 위협 앞에 각성하다(에스토니아)
3회 70여년 잠자던 대국, ‘시대전환’을 선택하다(독일)
“지난해 이 자리에서 함께 결심하길 바랐습니다만, 불행히도 러시아의 미사일이 우리 땅을 강타한 뒤에야 (세계는) ‘우크라이나와 함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것은 언제나 실수였고, 여전히 실수입니다.”
17일(현지시각) 오후 1시45분 세계 최대 안보회의가 열리는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 전세계에서 모인 각국 정상과 외교·안보 지도자 등 500여명이 ‘드니프로강의 다윗’이란 별명이 붙은 한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 회의 개막과 동시에 회의장 정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의 화상 연설이 이뤄진 뮌헨안보회의 패널의 주제는 ‘드니프로강의 다윗―자유를 향한 우크라이나의 투쟁’이었다. ‘골리앗’인 러시아는 올해 24년 만에 처음으로 이 회의의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24일이면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딱 1년이 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년 전인 지난해 2월19일 뮌헨안보회의 연설에선 2014년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뒤이은 8년간의 ‘돈바스(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도네츠크주) 전쟁’을 언급하며 “이것은 우크라이나만의 전쟁이 아니다. 유럽 모두의 전쟁”이라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예언대로 지난 1년간 유럽은 물론 세계의 안보 지형을 뒤흔들었다.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40년 만의 최악의 인플레이션이 찾아왔고, 치열한 전략 경쟁을 벌이는 중인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도 미묘한 파장을 몰고 왔다. 이 전쟁으로 인해 전세계가 미-소 간 동서 갈등이 극심했던 옛 냉전과 비슷한 ‘신냉전’에 휘말리게 됐다는 우울한 분석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모든 게 변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망설였던 미국과 유럽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이들은 우크라이나를 향해 엄청난 군사 지원을 쏟아붓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도 “우크라이나가 필요로 하는 한”,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위해 군사 지원을 이어가겠다는 서구 지도자들의 선언이 이어졌다.
<한겨레>는 이 전쟁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들이며 러시아와 무려 1340㎞의 국경을 맞댄 ‘중립국’ 핀란드부터 찾았다. 11일(현지시각) 오후 방문한 핀란드 수도 헬싱키 쇠르네이넨에 있는 대피소 입구에는 주황색 사각형 안에 파란색 세모가 그려진 국제 민방위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는 굳게 잠겨 있었다.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자 동굴처럼 생긴 터널이 나왔다. 터널 안은 밝은 조명이 켜져 환했다. 곳곳에는 소화기가 놓여 있고, 비상구 위치를 알리는 표시판이 붙었다. 터널을 따라 100m쯤 걸어가니 뜻밖에도 스포츠센터가 나왔다. 높이 4.5m, 너비 21m짜리 공간은 아이들이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마루 하키 경기장, 축구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지하 약 20m 아래에 있는 이 공간은 평소 시민을 위한 체육시설로 활용되지만, 전쟁 등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72시간 안에 ‘방공호’로 바뀐다.
핀란드 구조법에 따라 건물의 연면적이 1200㎡(산업용 건물은 1500㎡)를 넘을 경우 반드시 대피소를 설치해야 한다. 이 공간 역시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3일 안에 대피 공간으로 전환된다. 핀란드 내무부는 9일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시민이 대피할 수 있는 이런 공간이 핀란드 전역에 약 5만500개라고 공식 발표했다. 553만명의 인구 가운데 87%에 이르는 48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수도 헬싱키에는 시민 전체 수보다 34% 정도 더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대피소, 방공호가 마련돼 있다. 이러한 대피소의 약 85%는 1971년 이후 건설됐다.
최근 핀란드 정부가 최신 대피소 통계를 공개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예민해진 안보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난해 2월 말 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3월부터 핀란드 내에선 ‘우리가 정말 위기에 대처할 역량을 갖췄는가’를 자문하는 뜨거운 논의가 시작됐다. 현지 언론들은 일부 대피소엔 물이 차거나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등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이 같은 문제점을 받아들여 8월까지 조사를 벌여 최종 보고서를 낼 예정이다.
11일(현지시각) 핀란드 수도 헬싱키 도심에 있는 방공호 내부 모습. 지하 약 20m에 마련된 이 방공호는 평시에는 체육시설과 주차장 등 시민들의 일상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이 방공호에는 핀란드 법에 따라 소화기 등 각종 장비가 갖춰져 있다. 헬싱키/노지원 특파원
그와 함께 추진된 것은 역사적인 나토 가입 결정이었다. 핀란드는 동쪽으로 러시아와 기나긴 국경을 맞대고 있다. 특히 북부 국경은 러시아 북해 함대의 핵잠수함이 배치된 무르만스크 군사기지와 마주 보고 있다. 수도 헬싱키에서 러시아 제2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불과 300㎞ 거리에 있다. 이런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된 1939년 11월 핀란드는 소련의 침공을 받아 105일 동안 ‘겨울 전쟁’을 치렀다. 1940년 3월12일 핀란드가 소련과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끝냈지만 총 3만5084㎢에 이르는 카렐리야와 살라 영토를 러시아에 넘겨야 했다. 이때의 기억은 핀란드인의 마음에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들은 외부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 중립의 길을 택했다.
러시아의 침공은 핀란드가 전후 80년 가까이 유지한 이 노선을 포기해야 할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침공 두달 만인 4월부터 핀란드가 나토 가입을 고려한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뒤 다시 한달여 만인 5월18일, 핀란드는 스웨덴과 함께 나토에 정식 가입 신청서를 냈다.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는 18일 뮌헨안보회의에서 핀란드의 나토 합류 결정에 대해 “이웃 나라인 러시아가 우리의 또 다른 이웃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핀란드가 나토에 합류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했다”며 “그것(나토에 가입해서 얻게 되는 안전보장)이 러시아가 넘지 않을 유일한 선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헬싱키의 한 대피소 앞에서 만난 시민 마르쿠(67)는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에 솔직히 더 두려워진 게 사실”이라며 “왜 아직도 우리가 나토에 가입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군비 강화 계획도 이어졌다. 핀란드는 지난해 9월 2023년 국방비로 61억유로(약 8조4천억원)를 지출하겠다고 발표했다. 2022년보다 무려 20%(10억유로·약 1조3700억원)나 늘어난 규모다. 안티 카이코넨 당시 핀란드 국방장관은 유럽에서 군사적 긴장이 격화되는 상황을 강조하며 “우리는 안보에 전례 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핀란드는 올해 국내총생산 대비 국방비 지출을 2.25%(2022년 1.96%)까지 올리기로 했다.
핀란드에 있는 모든 지하철역은 위기 상황 발생 시 시민들을 위한 대피소로 활용된다. 주황색 사각형 안에 파란색 세모가 그려진 민방위를 뜻하는 국제적 표시로 이곳이 대피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0일(현지시각)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 있는 헬싱키 대학교 역 내부 풍경. 헬싱키/노지원 특파원
핀란드 정부가 지난해 4월 발표한 2023~2026년 정부 재정계획에도 전쟁으로 고조된 위기의식이 배어 있다. 이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영향은 오래 지속될 것이고, 안보 상황은 긴장되고 예측이 어려울 것”이라면서 군 운영 비용에 연간 1억3천만~2억유로(약 1790억~2750억원) 증가분을 할당하고 국경경비대를 위한 감시 항공기를 구입하기 위해 1억6300만유로(약 2240억원)를 배정했다. 핀란드는 전쟁 발발 직전인 지난해 2월 미국산 F-35A 64대가 포함된 84억유로(약 11조5800억원)에 달하는 무기 수입 계약을 체결했다. 같이 나토 가입의 길을 가기로 한 스웨덴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스웨덴의 지난해 국내총생산 대비 국방비 지출은 1.45%에 그쳤지만 2026년까지 2%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스웨덴의 군축 및 비확산 대사, 주한 스웨덴 대사 등으로 일한 야콥 할그렌 스웨덴 국제문제연구소(UI) 소장은 자신들이 중립국 지위를 내려놓고 나토에 가입하기로 한 이유를 설명했다. “(러시아의 침공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약 70년 동안 이어진 질서가 더는 적용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2022년 봄, 비동맹의 확고한 지지자였던 사회민주당마저도 돌아섰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수 있다면, 그다음은 핀란드, 벨라루스, 몰도바, 폴란드가 될 수도 있다.”
헬싱키·뮌헨/노지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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