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 20주년인 11일 밤(현지시각) 뉴저지주 익스체인지 플레이스에서 미국인들이 촛불을 켜고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허드슨강 너머로 테러 현장이었던 옛 세계무역센터WTC) 터에 재건한 ‘원 월드 트레이트 센터’와 추모의 뜻을 담은 파란색 빛이 하늘로 솟구치는 광경이 보인다. 뉴저지/로이터 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급작스러운 철군이 완료된 지난달 31일(현지시각)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에 관한 결정은 단순히 아프간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라며 “이는 다른 나라들을 다시 만들려는 주요한 군사작전 시대의 종결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날 대국민 연설을 두고 <뉴욕 타임스> <파이낸셜 타임스> 등 주요 언론들은 ‘바이든 독트린’의 부상이라고 해석했다. 바이든 독트린의 출발점은 중동 등에서 무제한적인 분쟁 수렁에 빠지지 않는 등 전세계적 군사개입을 축소·자제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안팎의 비난을 무릅쓰고 8월 말 종료된 아프간 철군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국가 안보의 초점을 중국, 러시아 등 ‘전략적 경쟁자’들과의 대결에 맞추고, 기후변화 등 새로운 도전에 대처하는 것을 핵심적인 국가 이익으로 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이든 독트린의 핵심은 사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이후 10년 넘게 미국이 추구해오던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아시아로의 귀환’(Pivot to Asia) 정책을 내놓았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중동 철군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번 철군의 바탕이 된 탈레반과 ‘도하 평화협상’을 타결한 것도 전임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중국의 부상’이 본격화된 2010년대 초부터 미국은 중동에서 벗어나, 중국과의 대결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이름을 딴 독트린으로 다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처한 현실을 보면, 이 과제가 결코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아프간 전쟁 등을 부른 ‘테러와의 전쟁’의 상대인 테러 세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바이든 대통령이 아프간 철군을 완료한 뒤 “나는 이 영원한 전쟁을 연장시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그 순간에도 미국은 사하라사막 깊은 곳에서 테러 세력을 추적하는 비밀기지들을 확장하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리비아의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뿐 아니라 나이지리아·차드·말리의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드론이 이 기지에서 운용된다. 미군의 아프리카사령부는 소말리아의 알카에다 연계 무장 세력인 알샤바브에 드론 공격을 재개하는 한편 소말리아에 특수군 훈련관을 재파견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신문은 꼬집었다.
브라운대 전쟁비용프로젝트는 미국이 2018~2020년 85개국에서 테러에 개입했다고 집계했다. 미국은 이라크·케냐·말리·나이지리아·소말리아·시리아·예멘과 철군을 완료한 아프간 등 12개 국가에서 직간접적으로 전투에 개입했다. 카메룬·리비아·니제르·튀니지에서는 특수작전을 펼칠 합법적 권한까지 갖고 있다. 아프간·이라크·리비아·파키스탄·소말리아·시리아·예멘 7개국에서는 공습이나 드론 공격을 수행하고 있다. 미군은 41개 국가에서 대테러 훈련을 해왔고, 80개국에서 군경과 국경수비대를 훈련시켜왔다. 이라크 전쟁이 일단락됐던 2008년 이후에도 카타르·바레인·이라크·터키·아랍에미리트연합·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고, 이들 나라에 더해 요르단·쿠웨이트·시리아에 모두 6만~8만명의 미군을 주둔시켜오고 있다. 전세계에 주둔 중인 미군은 약 20만명에 이른다. 전통적인 대규모 주둔 국가인 일본·독일·한국을 제외하면, 해외 주둔 전력의 70% 가까이가 여전히 중동에 집중돼 있다.
미국은 이런 군사적 개입을 지속할 수도 발을 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테러에 대응하려고 미국이 개입한 나라들의 현지 정부들은 미국 의존도가 심화된 상태다. 아프간은 미국의 이런 딜레마를 전형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이라크전 수렁에서 탈출하려고 군사력을 철수에 가깝게 축소한 이후엔 이슬람국가가 부상했다.
11일 뉴욕 맨해튼의 옛 세계무역센터 자리인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9·11 테러 20주년 기념식에 유가족들이 입장하고 있다. 뉴욕/황준범 특파원 jaybee@hani.co.kr
9·11 테러 이후 미국 대외전략에서 군사력 사용의 비중이 늘어났다는 점도 중국과의 경쟁에 효과적인 대처를 막고 있다. 9·11 테러가 일어난 2001년 미 국방비는 2930억달러였다. 중국과 유럽 국가들 등 2~16위 국가들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현재 미국 국방비는 7천억달러(2022년 요구액은 7150억달러, 약 836조5500억원)에 달해, 세계 나머지 국가의 국방비를 합친 것과 거의 같다. 외교를 책임지는 국무부 예산은 585억달러로, 국방부 예산의 8%에 불과하다. 9·11 테러 이후 국방부는 늘어나는 예산과 커지는 군사개입에 맞춰 국방부와 군의 기구와 역할을 끝없이 확대했다. 국방부가 미국의 대외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국방부와 군은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한 ‘아프간 페이퍼’에서 보듯 아프간 전황을 호도하고 그 수렁에 빠지게 했으면서도, 철군을 끝까지 반대했다.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대처에서도 미국은 대결적 관점, 특히 군사적 대결의 관점에 집중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 때 시작된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항행의 자유’ 작전을 시작으로 공세적인 인도·태평양 전략의 전개 등이 그렇다. 최근에는 중국의 대만 침공까지도 상정하며 미-일 동맹 강화를 통한 군사적 대응책을 짜고 있다.
아프간 철군과 바이든 독트린은 1970년대 베트남 철군과 닉슨 독트린에 비유된다. 미국의 지나친 군사력 전개와 개입을 축소하고, 다른 주적에 대항하려는 전략이다. 닉슨 독트린은 당시 소련이라는 주적에 대항하려고 중국이라는 전략적 협력자를 찾는 것이었다. 바이든 독트린은 9·11 이후 20년 동안 막강한 경쟁자로 부상한 중국에 맞서기 위해서 무사히 중동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또 미-중 전략경쟁이란 건곤일척의 승부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이끌 전략적 협력자를 찾을 수 있을까?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