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시민들이 22일 수도 키예프의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돈바스 반군 세력의 독립을 승인한 러시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키예프/로이터 연합뉴스
“푸틴, 비열한 놈!”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22일 러시아의 돈바스 분리주의 세력 독립 승인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에 참석한 활동가 로만 티셴코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우리는 블라디미르 푸틴이나 그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위대는 북소리에 맞춰 “푸틴, 비열한 놈”이라는 구호를 계속 외쳐댔다. 티셴코는 “이 구호는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를 훔쳐갔을 때 축구팬들이 만들어 쓰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키예프 시내 묘지에선 한 장교의 장례식이 진행됐다. 지난 주말 분쟁 지역인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숨진 안톤 시도로우(35)가 이날 묘지에 묻혔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동부 지역 무력 충돌로 인해 가장 먼저 희생된 군인들 중 하나라고 미국 일간 <뉴욕 타임스>가 전했다. 시도로우의 한 동료가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고 외치자, 장례식 참석자들이 “영웅들에게 영광을!”이라고 호응했다. 신문은 이 장례식은 키예프 시민들 사이에 흐르는 ‘이중의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위협이 계속되는 가운데 음울함을 느끼면서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방위원회(NSDC)는 23일 전국 비상사태 선언을 의회에 요청했다. 의회 승인 절차를 거치면 비상사태가 발령되며 야간 통행금지 조처 등을 할 수 있다. 올렉시 다닐로우 우크라이나 국가안보위원회 위원장은 30일 동안 비상사태를 발령할 예정이고 30일 더 추가될 수 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날 18~60살 국민을 대상으로 예비군 소집을 시작했다. 또한, 300만명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거주 우크라이나인에게는 즉각 러시아를 떠나라고 권고했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민간인들의 총기 소지를 허용하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러시아 국경에서 40㎞ 떨어진 동북부 하르키우(하리코프)에선 학생들을 상대로 방탄조끼 사용법과 폭발물 대비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이 실시됐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이 지역은 러시아가 침공할 경우 첫번째 공격 대상으로 꼽히는 곳이다. 민방위 전문가 올렉산드르 셰우추크는 “어린 학생들이 다치거나 숨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교육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평범한 우크라이나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저항은 ‘일상을 지키는 것’인 것처럼 보였다. <가디언>은 키예프 시민들의 ‘집단적인 무기’는 바로 일상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키예프의 카페와 식당들은 21일 밤 55분에 걸친 푸틴 대통령의 노골적인 위협이 이뤄진 이튿날에도 문을 열고 정상 영업을 했고, 엄마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공원을 찾아 이제 막 찾아오기 시작한 초봄 햇살을 즐겼다. 자갈이 깔린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전거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많은 차량은 “우크라이나를 믿는다”고 쓴 깃발 등을 걸고 운행했다.
우크라이나 북동부 도시 하르키우에서 학생들이 22일 폭발물 대처 방법 등을 배우고 있다. 하르키우/로이터 연합뉴스
키예프를 동서로 가르는 드니프로(드네프르) 강변의 그림 같은 유리 다리 앞에는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결혼사진 전문 사진사인 데니스 아스타펜코는 러시아가 거짓 소문을 퍼뜨리면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겁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많은 소문이 돌지만, 나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날 아침에도 여러 쌍의 결혼사진을 찍었다며 이번 주말까지 사진 촬영 예약이 모두 끝났다고 전했다.
평온함을 지키려는 와중에도 일부 주민은 조용히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전쟁이 터질 경우 서부 지역으로 대피하려는 주민 일부는 반려동물들을 동물 보호소에 맡기고 있다. 일부 군사용·사냥용 무기 판매소에서는 총이 동나기도 했다고 <뉴욕 타임스>가 보도했다.
우크라이나인들 가운데 당장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돈바스 지역 내 반군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밀려난 피난민들이다. 최근 이 지역에서 반군과 정부군의 충돌이 심해지자, 일부 주민은 러시아 로스토프 지역으로 대피했다. 이들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 채 불안에 떨고 있다고 <유로 뉴스>가 전했다.
아이들과 함께 로스토프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는 32살 여성 크리스티나는 <유로 뉴스>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그냥 기다리라는 말만 듣고 있다”며 “울고 싶은 심정이지만 어린아이들 때문에 울지도 못한다”고 했다. 15분 만에 짐을 싸고 집을 떠났다는 오우샨니코바 이리나 페트로우나는 현재 이 호텔에 9살짜리 손자와 머물고 있다며 “모든 게 두렵고 어린아이들이 특히 걱정된다”고 말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