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리비프(르비우)에서 시민들이 러시아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위장막을 만들기 위해 천을 뜯고 있다. 리비프/AP 연합뉴스
지난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우크라이나의 강한 저항과 서구의 가혹하고 단결된 경제 제재에 맞부딪히며 개전 6일 만에 ‘출구’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전쟁은 시작할 때보다 끝내는 게 어렵다는 것은 고금동서의 진리다.
푸틴 대통령은 24일 개전 연설에서 우크라이나를 점령할 의사가 없다면서, 탈나치화·탈무장화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이번 사태에 책임 있는 자들을 처벌할 것이라고 밝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권을 참수(제거)한 뒤 친러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의미였다. 미국 국방부도 러시아가 개전 첫날부터 수도 키예프(키이우)에 신속히 진공해 점령하려 한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분석 결과를 내놨다.
러시아는 애초 키예프에 공수부대 등을 투입해, 젤렌스키 정부만을 꼭 집어 들어내는 ‘외과적 공격’을 도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공수부대가 교두보 확보를 위해 점령한 키예프 외곽의 안토노프(안토노우)공항에 병력 보충이 이뤄지지 않으며, 우크라이나군에 탈환되는 등 공방이 이어졌다. 그에 따라 키예프 조기 점령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현재 교착 상태에서 러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두가지로 좁혀진다. 첫째는 키예프 점령을 위해 본격적 시가전을 불사하는 등 가차 없는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여러 위성사진을 보면, 러시아는 키예프시 외곽에 25㎞ 길이에 이르는 대규모 전력을 투입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 전력이 세계 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맹공을 퍼부으면, ‘키예프 사수’를 외치는 우크라이나군은 버텨낼 수 없다. 존 커비 미 국방부 대변인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계획이 “일정보다 늦어지고 있다”면서도 러시아군이 직면하는 저항을 가지고 무언가를 예상하는 일은 위험하다고 전했다. 키예프가 끝까지 러시아의 공세를 버텨낼 것이라 기대하긴 힘들다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은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희생과 비용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상대국의 수도를 겨냥한 무자비한 공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커지면, 국제사회와 러시아 국내의 반전 목소리가 더 커질 수 있다.
게다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등 통신 기술의 발달로 전세계인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하는 일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는 중이다. 만에 하나 ‘키예프 대학살’이 발생하면, 국제사회가 똘똘 뭉쳐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반러시아 연대’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마음엔 씻기 힘든 분노와 증오의 씨를 뿌려 전후 통치가 사실상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이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푸틴 대통령 자신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역사적 일부’라고 말한 것처럼, 이 지역엔 러시아계 주민이 1천만명 가까이 살고 있다. 러시아 내에도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많다. 이들은 다양한 혈연관계로 묶여 있다. ‘사촌’을 상대로 한 끔찍한 군사작전은 러시아 내의 반발도 폭발시킬 것이다. 이미 러시아 내 반전시위로 28일까지 6천명 이상이 체포됐다.
두번째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젤렌스키 정부와 타협하는 길이다. 정확한 협상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두 나라 고위 협상단은 개전 닷새째인 28일 우크라이나-벨라루스 국경지역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푸틴 대통령의 측근 중 한명으로 이번 협상의 대표인 블라디미르 메딘스키는 회담이 거의 5시간 동안 진행됐고, 대표단은 “공통의 입장이 기대되는 어떤 사항들을 발견했다. 다음 회담은 며칠 내로 폴란드-벨라루스 국경에서 열자고 합의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그동안 요구해온 우크라이나의 중립화 등을 얻어내며 타협하면, 그 뒤로는 젤렌스키 정부를 통해 국내외 저항을 줄이고 향후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레임 길 시드니대 국제관계학 석좌교수는 <알자지라>와 한 인터뷰에서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반감을 고려할 때 젤렌스키 정부를 유지시켜서 협상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푸틴 대통령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가와 밀접히 연결돼 있다.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친러 세력이 세운 ‘자칭’ 공화국들의 인정을 넘어, 우크라이나의 사실상 분할을 의미하는 ‘연방제 수립’ 등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 분명한 점은 시간은 푸틴 대통령의 편이 아니란 점이다. 판단이 늦어질수록 우크라이나 전쟁의 ‘엔드게임’에서 러시아의 선택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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