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세계 원유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2일 미국 내 휘발유 값은 갤런당 3.6~3.7달러선까지 올랐다. 덴버/AP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세계 1위 천연가스 수출국이자 3대 산유국인 러시아를 고립시킬 수 있도록 “원유 수입을 금지하자”는 목소리가 미국 정계에서 쏟아지고 있다. 상당한 경제적 고통을 떠안더라도 막대한 천연자원을 ‘지정학적 무기’로 사용해온 러시아의 발을 묶자는 의도지만, 현실화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조 맨친 민주당 상원의원은 1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에너지를 무기화했다”며 러시아 원유의 미국 수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도 “러시아에서 오는 기름에는 (우크라이나인의) 피가 들어 있다”며 러시아 에너지 분야에 대한 제재를 주장했다. 미국은 지난해 기준으로 원유와 정유제품의 8%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러시아의 원유 수출량은 하루 약 500만배럴로, 대부분 북미가 아닌 유럽으로 간다.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은 2020년 현재 1조4834억달러(세계은행 기준)로 한국(1조6378억달러)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옛 소련을 계승한 광대한 영토, 6천발이 넘는 핵탄두, 막대한 지하자원 등으로 인해 미국·중국과 함께 세계를 삼분할 수 있는 대국으로 취급받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큰 충격을 받은 미국 정계에서 러시아의 자금줄을 틀어막아, 푸틴 대통령을 무너뜨리자는 초강경론을 쏟아낸 셈이다. 미국은 그동안 발트해 해저를 통해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직접 수입할 수 있는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 사업을 추진하는 독일을 향해서도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높이면 안 된다’고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아왔다.
하지만, 이 주장대로 할 경우, 안 그래도 고공행진 중인 기름값은 더 오를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침공 이후 1일 브렌트유는 런던 아이시이(ICE)선물거래소에서 전날보다 7.1%(7.00달러) 오른 배럴당 104.97달러에 마감됐다. 2014년 8월 이후 최고가다. 미국 주유소 기름값도 9주 연속 올라 1갤런당 3.61달러에 이른다. 코로나19 초기인 2020년 4월 1.77달러에서 2배 이상 뛴 것이다.
미국 내 정치 상황을 봐도 이 주장이 현실화되긴 쉽지 않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역시 1일 취임 후 첫 국정연설에서 “나의 최고 우선순위는 물가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지율 하락을 겪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물가상승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최대 걸림돌이다. 그 때문에 미국은 푸틴 대통령 개인, 러시아 중앙은행, 주요 은행들의 자금 거래를 막으면서도,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에는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이에 견줘, 캐나다는 최근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캐나다는 2019년 이후 러시아 원유를 수입하고 있지 않은 터라 실질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니코스 차포스 에너지·지정학 석좌는 <월스트리트 저널>에 “(러시아 에너지 수입 금지는) 위험한 전략이다. 특히 천연가스 수입 금지는 유럽에 재앙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유럽연합(EU)이 소비하는 원유의 4분의 1, 천연가스의 40%를 공급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산 원유에서 손을 떼는 민간기업들의 움직임이다. <뉴욕 타임스>는 핀란드 네스테, 스웨덴 프렘 등 일부 정유업체들이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중단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글로벌 정유기업 셸, 비피(BP)도 러시아와의 사업을 포기하거나 투자를 철수한다고 밝혔다. 이 조처들은 러시아 응징이 아니라 사업상의 불안정성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황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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