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라이 주민이 구호를 위해 제공된 밀을 퍼담고 있다. 2021년 5월 8일 촬영됐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주하이르 카피예는 베이루트에서 120년 된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 레바논의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사태에도 살아남았지만,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평소 빵과 파이 등이 진열됐던 매장은 거의 텅 비었다.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밀가루값이 1000% 올랐기 때문이다. 카피예는 “빵값을 50% 올렸지만, 그거론 안된다. 그동안 주문받은 빵만 만들어 왔는데, 이젠 한계에 다다랐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가난한 나라에 극심한 공급부족과 물가상승 등으로 큰 고통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2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글로벌 시대에 전쟁이 불러온 석유 식량 등의 공급망 교란에서 자유로운 곳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지만, 무엇보다 이를 견뎌낼 여력이 별로 없는 개발도상국이 더 큰 충격을 받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세계 밀수출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해바라기씨 기름 수출시장의 52%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은행의 인더미트 길 부회장은 “전쟁이 지속되면 그 충격은 아마 코로나19보다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선진국 경제는 올해 말이면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의 경우 내년 말이 되어도 여전히 4% 밑돌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길 부회장은 “개발도상국의 부채 수준이 50년 만에 최고”라며 “전쟁으로 물가가 오르면 개발도상국에 대한 투자가 더 위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원유의 세계수출시장 점유율이 12%로 세계 2위이고, 천연가스와 비료 점유율은 세계 1위다. 원유 가격은 이번 전쟁으로 올해 말까지 2012년에 견줘 갑절인 배럴당 130달러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측된다. 비료 공급부족과 가격 상승은 식량생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식량가격 급등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전쟁의 직격탄을 맞은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에선 이미 옥수수와 밀 농사 면적이 줄어들었다.
개발도상국은 대부분 이에 따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밀 수입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크게 의존해왔기 때문에 충격이 더 크다. 2011년 이들 지역을 휩쓴 민주화 시위인 이른바 ‘아랍의 봄’의 불씨가 애초 빵값 폭등이었다는 사실은 이들 지역 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집트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빵값 보조금 비용을 10억 달러(1조2138억원) 늘렸으며, 보조금을 받지 않는 빵가격의 인상을 통제하고 있다. 레바논은 6개월치 분량의 식량만 보유하고 있다. 아민 살람 레바논 경제장관은 “좀 더 많은 밀을 좋은 조건에 구매하기 위해 우호적인 나라와 접촉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말리아에선 가뭄과 정정불안, 무력충돌 등으로 인한 기존의 어려움에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겹치며 많은 이들이 거의 기아 상태에 빠졌다. 소말리아 남부 키스마요 종합병원에는 지난 2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두 배 많은 207명의 5살 미만 영유아가 영양실조로 입원했다.
인도와 터키, 타이, 칠레처럼 원유 등 에너지의 해외 의존도가 큰 나라도 타격이 크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유가 급등이 이들 개발도상국의 한 해 성장률을 1%포인트 떨어뜨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파키스탄에선 서민 생활에 주름살을 지우는 인플레이션이 정치 쟁점화했다. 정부는 휘발윳값 안정을 위해 15억달러(1조8199억원) 규모의 보조금 지급 계획까지 발표했지만, 야당에선 임란 칸 총리 정부가 최근 물가 안정에 실패했다고 맹공에 나서고 있다.
탄자니아는 이번 달 에너지값 수입세까지 철폐했지만, 유가 상승을 막진 못하고 있다. 사미아 술루후 하산 대통령은 “모든 상품 값이 오른다.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다. 정부 잘못이 아니다. 세계가 다 그런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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