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대표적 올리가르히(신흥재벌)인 영국 프로축구 첼시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
영국 프로축구 첼시의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55)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올리가르히(신흥재벌)로 꼽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20년 이상 인연을 유지하고 있고, 독립 탐사보도 연대체인 ‘조직범죄·부패보도 프로젝트’(OCCRP) 집계에 따르면, 80억달러(약 9조7000억원) 이상의 어마어마한 자산을 보유 중이다. 그 때문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유럽연합(EU)과 영국 등은 ‘자산 동결’ 등의 제재를 가했지만, 미국은 아직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23일 미국이 아브라모비치에 대한 제재를 미루고 있는 것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요청 때문이라고 전했다. 서구에 강력한 대러 제재를 촉구하고 있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아브라모비치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평화협상에서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제재에서 제외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보도를 보면, 미 국무부는 이달 초 아브라모비치에 대한 제재안을 발표하려 했으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유보해달라고 제동을 걸었다. 신문은 이 사안을 잘 아는 소식통을 인용해 그로부터 얼마 전 젤렌스키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통화에서 아브라모비치가 우크라이나-러시아 평화협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제재를 유보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이 요청이 효력을 발휘해 미국 정부가 아직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우크라이나 정부는 모두 말을 아꼈다. 에밀리 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확인을 요청하는 신문의 질의에 언급을 거부했고,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은 아브라모비치의 역할에 대한 질문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대화와 외교에 관여할 수 있는 채널은 여러 개 있다”고만 답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역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이스라엘 언론들은 아브라모비치가 지난달 말 우크라이나 정부의 요청으로 우크라이나-러시아 협상을 돕기 위해 벨라루스를 방문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아브라모비치의 대변인 역시 “협상 성공을 위해, 협상 과정이나 아브라모비치의 관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브라모비치는 가능한 한 빨리 평화를 복구하려는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왔다”며 여운을 남겼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달 24일 개전 이후 28일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4차 협상까지 진행해왔으나, 영토 문제 등 난제로 인해 아직 합의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아브라모비치는 1990년대 국영 석유회사 시브네프트가 민영화되자 이를 시장 가치보다 싸게 사들인 뒤 2005년 주식 73%를 130억달러에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 가스프롬에 매각했다. 2000년에는 러시아 북동부 추콧카 주지사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고, 2003년에는 첼시 구단을 인수했다. 러시아뿐 아니라 포르투갈·이스라엘 국적도 보유하고 있다.
영국 언론인 캐서린 벨튼은 2020년 저서 <푸틴의 사람들>에서, 아브라모비치가 주지사에 출마한 것도, 첼시 구단을 인수한 것도 푸틴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썼다. 특히 첼시 구단 매입은 영국 국민들을 파고 들려는 의도였다고 벨튼은 푸틴 대통령의 측근을 인용해 전했다.
‘조직범죄·부패보도 프로젝트’가 지난 21일 만든 ‘러시아 자산 추적기’(Russian Asset Tracker) 누리집을 보면 아브라모비치의 자산은 최소 80억5598만달러에 이른다. 그는 프랑스 리비에라 해변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각각 8900만달러, 1530만달러짜리 주택을 갖고 있으며, 에어버스의 M-SOLO 헬리콥터(가치 알 수 없음)도 보유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영국이 자신을 제재할 것이라는 분위기를 눈치 채고 지난 2일 첼시 구단을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황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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