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현지시각)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에서 철수한 뒤 키이우 북서부에 있는 도시 부차의 거리에 주검들이 참혹하게 널브러져 있다. 부차/AFP 연합뉴스
아직 겨울 한기가 가시지 않은 3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 도심에서 북서쪽으로 37㎞ 떨어진 작은 도시 부차의 하늘에선 가는 진눈깨비가 날렸다. 러시아군이 철수한 뒤 이뤄진 우크라이나 정부의 조사 과정에서 파헤쳐진 구덩이 속에는 까만 봉지 속에 담긴 주검 수십구가 뒹굴고 있었다. 미국 <시엔엔>(CNN)의 카메라가 구덩이를 좀 더 자세히 비추자 파랗게 변색한 주검의 손과 신발 등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구덩이 앞에서 쭈그려 앉은 우크라이나인 블라디미르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는 동생 드미트리가 이 구덩이에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를 달래던, 이웃에 살던 한 여성 노인은 “왜 러시아가 우리를 그렇게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1930년대부터 우크라이나를 학대해 왔다. 우리를 부수고, 우리가 사라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이 지난달 31일 철수한 키이우 인근 지역을 수복하면서, 러시아가 점령 기간 동안 최소 수백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날 러시아군에게서 탈환한 지역에서 민간인 시신 410구를 수습했다고 밝혔다. 이리나 베네딕토바 검찰총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주검 410구를 발견했고, 1~3일까지 140구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고 밝혔다. 부차는 전쟁 사흘째인 2월26일 러시아군에 점령돼 그동안 우크라이나의 접근이 이뤄지지 못했다.
학살의 증거는 도시 곳곳에 남아 있었다. <시엔엔>은 부차의 한 교회에서 집단매장지가 발견됐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이곳에만 150여명이 매장됐을 것이라고 말했고, 이 도시의 시장은 매장된 주검이 300구에 이를 수도 있다고 밝혔다. 부차의 참상을 지난 2일 먼저 보도한 <아에프페>(AFP) 통신은 거리 곳곳에서 민간인 복장을 한 주검을 최소 22구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일부 주검은 입을 벌린 채 숨져 있었고, 손이 뒤로 묶인 것도 있었다. 러시아군에 의해 살해된 부차 주민 테티아나 포마잔코(56)의 동창인 스비틀라나 무니치는 <뉴욕 타임스>에 “러시아군은 보이는 사람을 모조리 쐈다. 테티아나의 어머니가 집에 있는데도 가스관을 향해 총을 쐈다”고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 <시비에스>(CBS) 방송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저지르고 있고, 우크라이나 국민 전체를 말살하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서남부 해안 도시 오데사에서 3일(현지시각) 사람들이 러시아군의 폭격 뒤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오데사/AP 연합뉴스
쏟아져 나오는 주검에 국제사회는 할 말을 잃었다. 각국은 ‘부차 학살’을 비판하면서 철저한 조사를 주장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이날 <시엔엔> 방송에 출연해 집단 매장된 민간인 시신이 잇따라 발견된 데 대해 “이러한 사진을 볼 때 매우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군이 집단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직답을 피한 채 “러시아는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며 이를 자료로 만들고 정보를 제공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도 부차의 집단매장 사진이 “끔찍하고 공포스럽다”며 가해자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역시 “부차의 모습은 참을 수 없는 것이며 러시아 당국은 이 범죄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또한 “효과적인 책임 규명을 보장하기 위해 독립적인 조사가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사법기구의 창설을 승인했다. 그는 이날 공개된 화상 연설에서 “지구상에서 그러한 악행은 러시아의 전쟁범죄가 마지막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한 전쟁범죄에 가담한 이들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사법기구를 인가했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제노사이드”라고 주장한 만큼,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집단학살 혐의를 적극 공론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정상을 처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정의 실현’은 이뤄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끔찍한 범죄 혐의가 드러나자 러시아를 추가 제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워싱턴 포스트>는 두 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부차 학살에 대응해 러시아와 거래하는 제3자도 제재하는 ‘세컨더리 제재’ 등 러시아에 제재를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독일에서도 강경한 목소리가 나왔다. 크리스티네 람브레히트 독일 국방장관은 유럽연합이 러시아산 가스 수입 종료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예상대로 집단학살 의혹을 부인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성명을 내어 “러시아군이 저질렀다는 ‘범죄’를 증언하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사진과 동영상은 또 다른 도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마리야 자하로바 외교부 대변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이 문제 논의를 위한 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황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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