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모니터 화면 속)이 지난해 12월7일 화상으로 회담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2월 말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총탄이 오가는 실제 전쟁터보다 더 크고 결정적인 격전이 벌어지는 곳은 대러시아 제재를 둘러싼 국제경제의 무대이다. 미국 등은 직접 참전은 삼간 채 러시아를 굴복시키기 위한 처절한 경제 제재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전후 70여년 동안 이어진 미국의 패권과 국제질서의 위력을 과시하는 것이면서도, 그 종말을 앞당길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주도한 대러 제재는 △러시아산 에너지 등에 대한 수입 금지 △주요 기업들의 러시아 철수 △국제금융결제망인 스위프트(SWIFT)에서 러시아 배제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 동결 등이다. 이 가운데 러시아에 대한 금수와 기업 철수는 실물 부문, 금융망 배제와 외환보유고 동결은 금융에 대한 제재라 할 수 있다.
러시아 경제의 실물과 금융 부문을 동시에 타격하는 이번 조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개인·단체·국가에 부과한 각종 제재의 총합을 뛰어넘는 ‘전례 없는 조처’라 할 수 있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의 금융제재를 고안해온 후안 자라테 전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은 6일치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러시아 금융 및 상업 체계를 절연시키겠다는 공격적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신문은 특히 세계 지정학적 질서의 한 축을 이루는 국가인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를 동결시켜버린 조처는 “적을 응징하기 위해 미국의 달러와 다른 서구 국가의 통화를 무기로 사용한 것으로 아주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라는 평을 내놨다.
어마어마한 제재였던 만큼 위력은 강력했다. 제재가 발표된 뒤 러시아 루블화의 가치는 달러당 75루블에서 한때 138루블까지 절반으로 폭락했다. 서구 은행에 예치돼 있던 러시아 외환보유고가 동결되면서, 러시아는 현재 사실상 디폴트(국가 채무 불이행) 위기에 몰려 있는 상태다.
제재의 대오 역시 굳건하다. 2014년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때는 이견을 밝혔던 유럽연합 등이 제재에 앞장서고 있다. 중립국인 스위스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않은 노르웨이도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 회원국 27개국, 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일본 같은 전통적인 미국의 동맹국 외에 한국·싱가포르·대만·바하마 등도 제재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대러시아 제재 추적’에서 14일 현재 모두 39개 나라가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고 있다고 집계했다. <파이낸셜 타임스> 역시 이번 제재를 통해 ‘서구’라는 개념은 더 이상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굳건한 글로벌 동맹을 지칭하는 의미가 됐다고 평가했다.
제재에 참여하는 나라들은 세계 경제력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플레이어라는 점에서 이 연대는 질적으로 압도적이다. 하지만 전세계 195개 국가 중에서 동참하지 않는 주요국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불편한 균열’도 엿보인다. 미국과 치열한 전략경쟁을 벌이고 있는 경제규모 2위인 중국의 불참은 예상됐던 것이지만, 미국이 대중 견제를 위해 공을 들여온 인도는 물론이고, 남아프리카공화국·멕시코·브라질 등도 불참했다. 나아가 미국의 중동 내 주요 동맹국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같은 나토에 속해 있는 터키 역시 참여하지 않고 있다.
이들 국가가 유엔의 대러 비난 결의에는 동의하면서도 제재엔 동참하지 않는 것은 각자 나름의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금지 등 실물 부문이 아닌 정상 가동을 위해선 ‘중립성’이 중요한 금융 부문에까지 손을 대고 있다는 점에 적지 않은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2003년 이라크 전쟁과 2007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침식되고 있는 미국의 패권 질서가 이번 제재를 통해 결과적으로 한층 더 큰 타격을 입을 것이란 지적이다.
특히, 미국 등이 러시아 중앙은행을 상대로 자국 내 은행에 예치된 러시아 외환보유고를 동결시킨 조처 등은 기존 국제 금융 질서에 깊은 내상을 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스스로 기축통화인 달러를 무기화했으니, 미국과 경쟁 중인 중국·러시아는 이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국제 금융체제를 블록화하는 쪽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다. 실제, 우크라이나 전쟁을 전후해 달러 체제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여러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긴장 상황이 전쟁으로 치닫던 지난해 12월15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화상회담에서 “‘제3자’(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금융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노력을 가속화하겠다”고 다짐했다. 두 나라가 양국 무역에서 달러가 아닌 위안과 루블 결제를 늘리겠다는 노력은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미국이 스위프트 배제와 외환보유고 동결 등 이례적인 조처를 쏟아내면서, 두 나라는 향후 이 과제를 더 절박하게 추진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 중국이 2015년 10월 운영을 시작한 위안화국제결제시스템(십스·CIPS: Cross-Border Interbank Payment System)이다. 십스는 현재 100여개국 1200개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고위 관리였던 에스와르 프라사드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십스는 스위프트에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 게임체인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국제 경제에서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가진 인도와 사우디 등이 달러 결제를 축소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에너지 수입을 루블-루피화 결제 방식으로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우디 역시 중국에 판매하는 석유 결제대금의 일부를 위안화로 결제하겠다는 논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난달 15일 <월스트리트 저널> 보도를 통해 전해진 바 있다.
실제, 우크라이나 전쟁 전부터 각국 중앙은행들의 외환보유고 구성에서 달러 비중은 지속적으로 축소돼 왔다. 최근 국제통화기금 통계에 따르면, 12조달러에 상당하는 각국 중앙은행들의 외환보유고 중 달러의 비중은 1999년 71%에서 2021년 59%로 줄었다. 유로화 출범이 가장 큰 이유이나 중국의 위안화 등 다른 나라들의 통화 비중이 크게 늘었다. 국제통화체제 전문가인 배리 아이컨그린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최근 국제통화기금 공동 보고서에서 이를 “달러 우위에 대한 보이지 않는 침식”이라고 평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월4일 베이징에서 만났다. 두 정상은 이날 ‘무제한의 협력’을 다짐했고, 푸틴 대통령은 20일 뒤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베이징/타스 연합뉴스
마지막으로 러시아에 대한 제재 효과가 약화되고 있다. 미국이 지난 2월 말 이후 스위프트 배제 등 각종 조처를 쏟아내며 3월 초 한때 1달러당 135루블까지 떨어졌던 루블 가치는 최근 전쟁 이전 수준인 달러당 80루블 수준으로 반등했다. 러시아가 가스 등 에너지를 계속 수출하면서 달러나 유로 등을 벌어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러시아가 올해 이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이 사상 최고치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급등한 에너지 값으로 인해 3월 미국 내 소비자물가지수(CPI)가 40년 만에 가장 높은 8.5%까지 치솟으며 제재를 주도하는 조 바이든 행정부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부메랑 효과’도 관찰되는 중이다.
물론, 중국의 십스 결제망, 인도·사우디의 달러 결제 축소 검토 등은 여전히 압도적인 달러 체제에서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하다. 최대 도전자인 중국 역시 적지 않은 딜레마를 안고 있다. 중국은 달러를 제외하면 3조2천억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마땅히 둘 데가 없다. 나아가 위안화가 지배적인 국제통화가 되려면, 자유로운 외환거래를 허용해야 한다. 이는 중국이 국내 금융체제에 대한 통제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으로 당분간 불가능한 일이다. 미 재무부 고위 당국자를 역임한 존 스미스 ‘모리슨&포어스터’ 법률회사 공동대표는 “미국 달러 조종은 매해 울리던 것이었으나, 우리는 그런 사태를 보지 못했다. 미국 달러 체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포연이 걷힌 뒤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아이컨그린 교수 역시 도널드 트럼프 같은 이가 대통령을 한 뒤에도 달러 체제가 존속하는 것을 보고는 달러의 지위를 예전보다 덜 걱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 중앙은행 자산 동결은 충격이었다. 이것이 미국 은행에 대한 비호감으로 작용하고, 달러의 과도한 특혜를 침식하는 길로 갈 수 있다는 우려는 항상 존재한다”는 지적을 잊지 않았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