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7일 워싱턴에서 <파이낸셜 타임스> 미국판 편집인 에드워드 루스와 대담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 누리집
지난 냉전에서 미국이 승리를 거두는 결정적 계기가 된 ‘데탕트’를 실현한 전략가인 헨리 키신저(98) 전 국무장관이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연대를 ‘이완’(약화)할 수 있는 차별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9일치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미국판 편집인 에드워드 루스와의 대담에서 1970년대 중-러의 연대를 깨고 미-중 화해를 주도한 자신의 경험을 회상하며, “중국과 러시아의 동맹은 고정된 이해가 아니다. 현재 그것이 만들어졌지만 나에게는 본질적으로 영구한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키신저는 지난 냉전기 이데올로기 논쟁과 영토 분쟁으로 악화된 중-러 간의 균열을 파고들어 중국과 기적적인 화해를 실현한 바 있다. 미-중의 관계 개선으로 고립된 소련은 결국 1980년대 말에 접어들며 붕괴의 길을 가게 된다.
키신저 전 장관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 지정학적 상황은 중대한 변화를 겪을 것”이라며 “중국과 러시아가 모든 예측 가능한 문제들에서 같은 이해를 가진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가 (의도적으로 중-러 사이의) 이견을 만들어낼 순 없겠지만, 상황에 따라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다”며 “두 적수를 뭉치게 하는 방식으로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에 차별적인 접근을 해 양국 관계에 균열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앞서 커트 캠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인도·태평양 조정관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월28일 미국이 “동시에 두개의 전쟁 지역에 깊은 관여를 지속해야 하는 시기로 접어드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기 위해 쿼드·오커스 등을 통해 동맹국·우호국들을 규합하는 과정에 발생한 이번 전쟁으로 유럽 전선에서 러시아와도 적대할 수밖에 없게 된 ‘전략적인 곤경’을 드러낸 말이었다. 키신저 전 장관의 이날 발언은 미국이 ‘두개의 전쟁’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해선 안 되며, 두 나라를 차별적으로 대해 장기적으로 둘 중 하나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돌려놔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는 “중-러 중 어느 한 나라가 서방의 친밀한 친구가 될 것이란 게 아니고, 단지 특정 사안에서 우리가 차별적 접근을 할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향후 우리는 러시아와 중국을 같은 덩어리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충고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이어 현재 인류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경쟁하는 ‘변곡점’ 위에 있다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인식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기술의 진화 및 현재 존재하는 무기들의 엄청난 파괴력을 감안할 때 우리는 정권교체 추구를 피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평가도 내놓았다. 키신저는 지난 15년 동안 푸틴 대통령을 1년에 한번씩은 만났다며 “그의 기본적 확신은 러시아 역사에 대한 신비적인 신념 같은 것”이라며 “(예전에 소련의 영향 아래 있던 동유럽의) 전 영역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흡수된다는 것에 위협을 받기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푸틴이 자신이 국제적으로 직면한 상황을 오산했고, 러시아의 능력을 확실히 오산했다”며 “해결의 시간이 왔을 때 그런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시 주석에 대해서는 “어떠한 중국 지도자라도 푸틴이 처한 것 같은 상황을 피하고, 어떠한 위기에서도 자신들이 불리한 위치에 빠지지 않는 방안을 강구할 것으로 본다”며 중국이 대만해협 등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위기를 조성하지는 않을 것으로 진단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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