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28일(현지시각) 한 남성이 “푸틴을 멈춰라”라고 쓴 팻말을 들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비판 시위를 벌이고 있다. 베오그라드/AFP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하면서 유럽연합(EU) 회원국 사이에서 러시아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견해 차이가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독일 정상이 러시아와 대화를 통한 사태 해결 움직임에 나서자, 동유럽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꼴이라는 비판이 터져나오고 있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29일(현지시각)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전날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휴전과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재개 방안을 논의한 이후 에스토니아 등 동유럽 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마르코 미켈손 에스토니아 의회 외교관계위원회 위원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프랑스와 독일 지도자들이 러시아에 새로운 폭력 행위의 길을 부주의하게 열어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주요 유럽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는 푸틴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보는 이유가 뭔가?”라고 비판했다. 그는 “마크롱과 숄츠는 전화를 끊고 서둘러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여행편을 예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르티스 파브릭스 라트비아 부총리도 트위터에서 프랑스·독일 정상을 겨냥해 “정치 현실에서 동떨어진 채 자기비하 필요성에 사로잡힌 이른바 서방 지도자들이 여럿 있는 것 같다”고 썼다.
옛 소련에서 독립한 동유럽 국가들의 이런 반응은, 일부 유럽연합 회원국이 우크라이나에 종전을 위해 영토를 양보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는 의구심 탓이라고 신문은 지적했다. 가브리엘리우스 란즈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의구심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영토 점령을 허용하는 건 같은 일이 다른 곳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는 뜻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시아 등 전세계가 우크라이나를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다며 러시아를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전쟁을 어떻게 끝낼지를 놓고 서방이 이른바 ‘평화 진영’과 ‘정의 진영’으로 나뉘고 있다고 전했다. 불가리아 싱크탱크 자유전략센터(CLS)의 이반 크라스테프 회장은 ‘평화 진영’은 전투를 빨리 중단하고 협상을 하기 바라는 반면 ‘정의 진영’은 러시아가 공격의 대가를 비싸게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평화 진영’의 대표 국가로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꼽히고 ‘정의 진영’에는 영국, 폴란드, 발트해 3국이 있으며, 미국의 태도는 아직 불명확하다고 잡지는 덧붙였다. 두쪽의 견해 차이는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를 둘러싼 논란을 부르고 있으며, 전쟁 장기화에 따른 비용과 위험, 성과 문제, 유럽 질서 내 러시아의 위치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고 이 매체는 지적했다.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토 문제에 대해 절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28일 한 방송 인터뷰에서 “침공 이후 점령당한 땅을 모두 되찾을 수 있으면 러시아가 대화에 동의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해 전투를 통한 점령지 회복 의지를 내비쳤다. 하지만 “2014년 러시아가 병합한 크림반도까지 무력으로 회복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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