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의 전투가 격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남부 자포리자 원전에서 러시아 군인이 경계를 서고 있다. 에네르호다르/로이터 연합뉴스
유럽 최대 원전인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의 안전을 볼모로 한 ‘위험한 군사 도박’이 격화하고 있다.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은 서로 상대가 원전 시설을 폭격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원전 주변 군사 활동을 중단하라는 유엔의 요청에는 아직 응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자포리자주 점령지에서 구성한 지방 정부는 15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군이 미국산 엠777(M777) 곡사포를 동원해 자포리자 원전 주변과 인근 주거지에 두 시간 동안 25발의 대포를 발사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은 점령 정부 공보실을 인용해 우크라이나군의 폭격으로 원전 주변에서 대규모 폭발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자포리자 원전과 드니프로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도시인 니코폴의 우크라이나쪽 지방 정부는 이날의 폭격이 러시아군의 소행이라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주장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안드리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은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인들은 자포리자 원전을 폭격함으로써 세계에 자신들의 조건을 강요할 수 있을 걸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군은 침공 직후인 3월 초 가압수형 원자로 6기가 설치되어 있는 자포리자 원전을 점령한 뒤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해 왔다. 하지만, 7월 중순 우크라이나군이 헤르손주와 자포리자주에서 점령지 수복을 위한 반격을 본격화하면서 원전 주변에서도 전투가 격화하기 시작했다.
양쪽의 주장은 극단적으로 엇갈리지만, 러시아군이 원전을 보호막으로 삼아 공격을 진행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군도 이에 맞서 반격을 가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이날 자포리자 원전 근무자들의 말을 인용해 러시아군이 원전 내 위기 대응 센터를 봉쇄한 채 군인들의 벙커로 쓰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 직원은 우크라이나군이 지난달 22일 드론을 이용해 원전 내 러시아군 텐트를 공격한 이후 러시아군이 트럭과 장비를 원자로 1호기 시설 안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신문은 최근 들어 사전 경보도 없이 원전에 폭탄이 떨어지고 있으며, 폭발음이 들리면 직원들이 허겁지겁 대피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 원전 근무자는 원전 내 러시아군이 포를 쏠 때는 진동이 너무 심해 업무를 중단해야 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근무자들은 극심한 공포와 스트레스 속에 원전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드니프로강 건너편에 주둔한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원전을 점령한 러시아군에 대한 공격을 조심스럽게 벌이고 있다고 인정했다.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세르히 우크라이녜츠(42)는 <워싱턴 포스트>에 “원전에 사격을 가하진 않지만, 어떤 조건에서도 그러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군인은 ‘정확한 발사’가 가능할 때는 반격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남부 사령부 대변인은 원전 내 러시아군에게 반격을 가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지난 11일 자포리자 원전 주변의 군사 활동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 유엔은 이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동의하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조사단 파견을 지원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 전화 통화를 하고 원전의 안전한 운영 조건을 논의했다.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유엔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원자력기구 전문가들이 원전을 조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모든 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러시아는 조사단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거쳐 원전을 방문하게 하자는 유엔의 제안은 전선의 상황을 볼 때 너무 위험한 계획이라고 맞섰다. 원전 방문이 조만간 이뤄질지 미지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이 원전 시설을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럴 동기는 별로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원전 규제 기관에서 일했던 올가 코샤르나는 자포리자 원전의 원자로들은 강화 콘크리트와 강철로 만든 용기로 보호받고 있어 “작은 비행기가 떨어져도 감당할 수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에 밝혔다. 그는 러시아가 이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를 크림반도 등의 점령지에 공급하려고 하는 만큼, 이들의 관심은 원전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