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이 퇴각한 우크라이나 북동부 이줌에서 고문 흔적이 있는 시신 등이 집단으로 묻힌 매장지가 발견됐다. 군인들이 나무 십자가가 있는 무덤 앞을 지키고 있다. 이줌/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가 최근 수복한 하르키우주 이줌에서 고문 흔적이 있는 시신 등이 집단 매장된 묘지가 발견됐다. 17일(현지시각)까지 적어도 440기의 무덤이 발견됐으며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어, 지난 4월 초 450여구의 시신이 확인된 수도 키이우 인근 부차의 집단 학살 때보다 매장 규모가 훨씬 클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제 사회는 즉각 러시아의 학살이 다시 확인됐다고 규탄했고, 유럽연합(EU) 순환 의장국인 체코는 이번 학살을 조사할 특별 사법재판소 설치를 촉구했다.
우크라이나 동북부 하르키우주 이줌의 피시찬스케 묘지에서 이날 내내 흰색의 보호복과 장갑을 낀 시신 발굴 요원들이 소나무 숲 사이에 빼곡하게 들어찬 무덤들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였다. 일부 묘지에는 나무 십자가만 세워져 있었고, 사망자의 이름이 적힌 묘지도 있었다고 <에이피>(AP) 통신이 전했다. 일부 묘지 앞에는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꽃이 놓여 있었다.
<로이터> 통신은 발굴 요원들이 모래가 많이 섞인 흙 속에서 삽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시신들을 발굴하는 가운데 경찰들이 시신들의 사진을 찍었다고 전했다. 조사관들은 시신의 치아 상태를 볼 때 일부는 노인들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 지역의 로만 카샤넨코 검사는 16일 발굴된 3명의 시신은 신원이 확인됐으나 대부분은 아직 신원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발굴 작업이 시작된 직후 영상 연설을 통해 지금까지 적어도 440기의 무덤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아이들을 포함한 민간인들과 군인들의 시신이 발굴되고 있다며 한 시신은 목 주변에 줄이 감기고 팔이 부러지는 등 고문의 흔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크키우 경찰의 조사 책임자 세르히 보흐단은 손이 등 뒤로 묶인 시신도 나왔다고 전했다.
러시아군으로부터 탈환한 지역의 안정화 작업을 담당하는 군 장교 올렉 코텐코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현장의 가혹한 현실을 볼 때, 이줌에서 숨진 이들은 부차 학살 때보다 몇배는 많을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 4월 초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 인근에서 퇴각한 이후 키이우 교외의 부차에서는 458구의 시신이 확인된 바 있다고 <에이피>가 전했다. 또 키이우 외곽의 야산 등 다른 곳에서 확인된 시신도 1300구 이상에 이른다.
시신 발굴 작업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일부 주민이 실종된 가족의 유해를 찾으려는 기대 속에 발굴 작업을 지켜봤다. 현지 주민 볼로디미르 콜렌스니크는 지난 4월 이 지역이 러시아군에게 점령되기 직전 공습으로 아파트에서 숨진 친척들을 찾으러 나왔다고 말했다고 <로이터>가 전했다. 그는 숨진 친척들이 이 묘지에 묻혔으며 묘지에는 각각 번호가 붙여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199번 묘지에서 자신의 사촌인 유리 야코벤코의 이름을 확인했다며 러시아군이 점령하는 동안에는 묘지를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올레흐 시녜후보우 하르키우주 주지사는 러시아군의 점령 직전 5층 짜리 아파트가 포격을 당하면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바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 관계자들은 5월에도 이 지역이 공격을 당해 40명 이상이 숨졌다고 전했다.
이호르 클리멘코 우크라이나 경찰청장은 러시아군으로부터 되찾은 하르키우 지역에서 다수의 고문실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군이 점령했던 쿠피안스크에서는 스리랑카 출신 학생 7명이 러시아군에게 학대를 당했고 이 중에는 말을 거의 못할 지경에 이른 여학생도 한 명 있었다고 전했다. 다만, 고문실의 존재가 아직 독립적으로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고 <에이피>가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이줌의 집단 매장지에서 16일(현지시각) 발굴 요원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이줌/AP 연합뉴스
국제 사회는 즉각 러시아의 잔악 행위가 다시 확인됐다고 규탄했다. 유럽연합 순환 의장국인 체코는 집단 매장지 조사를 위한 특별 사법재판소 설치를 촉구했다. 얀 리파프스키 체코 외무장관은 이날 트위터에서 “지금은 21세기이고 민간인을 상대로 한 그런 공격은 상상할 수도 없으며 혐오스럽다”고 지적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앞서 16일 트위터를 통해 “우크라이나 이줌에서 자행된 잔혹 행위를 가장 강력한 언어로 규탄한다”고 밝혔고,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유럽연합은 러시아 군대의 비인간적인 행동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집단 매장지는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러시아쪽은 학살을 부인했다. 러시아가 하르키우주 주지사로 임명한 비탈리 간체프는 이줌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러시아군이 아니라 우크라이나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고 <타스> 통신이 전했다. 알렉산드르 말케비치 러시아 의회 자문위원은 우크라이나군이 전사자들을 방치해 러시아 군인들이 대신 매장했다고 주장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