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군인이 하르키우와 도네츠크 지역 경계에 있는 비석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설치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최근 러시아군에 반격을 하며 우크라이나 동북부에 있는 이 지역에서 러시아 점령군을 몰아냈다. 하르키우/EPA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이 확전과 수습의 기로에 서 있다. 이달 초 동북부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가 대규모 반격에 성공하면서, 미국과 러시아가 암묵리에 정했던 ‘금지선’을 넘으라는 압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사정거리가 300㎞(190마일)에 이르는 육군 전술 미사일 시스템(ATACMS·에이태큼스)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단 거부당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과 <뉴욕 타임스> 등이 지난 15일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크림반도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이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경우 러시아가 도발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는 이런 장거리 정밀타격 무기가 내년쯤 이뤄질 더 확대된 반격에 꼭 필요하다며, ‘러시아 본토와 민간인은 공격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며 지원을 압박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백악관 고위 보좌관들의 말을 빌려 미 국방부가 최근 몇주 동안 ‘장거리 미사일 시스템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다음 국면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냐’는 바이든 대통령의 문의에 대해 “효과가 최소한에 그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콜린 칼 국방부 국방정책 담당 차관도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반격하는 데 필요한 장비를 지원한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으나 “현재 전투와 직접 관련된 목표물”을 타격하는 데 에이태큼스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일부 미국 당국자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한 공세를 강화하면서도 전쟁이 유럽을 뒤흔드는 전면전으로 격화되지 않도록 나름 자제해왔다고 보고 있다. 실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중요 사회기반시설과 정부청사에는 제한적인 공격을 했고, 국경 밖 공급선에는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이들은 또 러시아가 바이든 대통령 취임 전에 미국 정부에 가한 사이버 공격을 고려하면 현재 우크라이나에 대한 사이버 공격 역시 ‘저강도’라고 보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우크라이나에 에이태큼스를 제공하면, 러시아 역시 그동안 지켜온 ‘금지선’을 넘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가 지금과 달리 △우크라이나 도시에 대한 무차별 폭격 △주요 지도자 암살 △국경 밖의 보급선 타격 등의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격받은 국가들이 반격하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러시아 간의 전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 러시아가 전쟁 초부터 거듭 위협해온 대로 흑해, 북극해, 혹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시험적으로 전술핵을 터뜨릴 수도 있다.
푸틴 대통령도 최근 비슷한 인식을 드러냈다. 그는 지난 16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한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우리는 사실 자제하면서 대응하고 있는데,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진 않을 것”이라며 “상황이 이런 식으로 계속 전개되면 그 답은 더 심각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아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테러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며, 최근 우크라이나 기반시설에 대한 러시아군의 크루즈 미사일 공격은 이에 대한 “경고 타격”이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코언 미 중앙정보국(CIA) 부국장 역시 “푸틴 대통령의 위험 감수 성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며 러시아에 기존의 금지선을 넘는 명분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미국 의회 내에선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첨단무기를 추가 제공하는 데 너무 신중하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제이슨 크로 하원의원(민주당)은 “에이태큼스를 제공한다고 실제 전쟁이 격화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국방부에서 일했던 에벌린 파커스 매케인연구소 국장도 “우리에게 기회의 창이 열렸다”며 “만약 우크라이나가 추가 반격을 하는 데 필요한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협상 테이블에서 힘을 얻지 못하고 러시아는 전열을 재정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서방과 우크라이나에선 에이태큼스로 상징되는 장거리 정밀타격 무기 지원과 이를 사용한 크림반도에 대한 직접 공격, 러시아에선 우크라이나 밖의 보급선 공격 등이 이 전쟁의 확전 여부를 가르는 기준선이 될 수 있다. 미 당국자들은 지금까지 러시아를 “끓는 물 안의 개구리”로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머잖아 그 개구리가 그대로 삶아질지, 거세게 튀어 오를지 판가름이 날 것으로 보인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