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폭발 사고가 발생한 크림대교 위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UPI 연합뉴스
의문의 폭발 사고로 한때 중단됐던 ‘크림대교’(케르치 다리) 통행이 하루 만인 9일(현지시각) 재개됐다. 러시아는 배후로 우크라이나를 지목하고, 자포리자 주거지에 미사일 공격을 퍼붓는 등 민간인까지 공격했다.
러시아 교통부는 이날 크림대교에서 여객 및 화물 열차가 운행을 다시 시작했다고 밝혔다. 비탈리 사벨리예프 교통부 장관은 “러시아 철도 동료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어 오늘 크림대교를 가로지르는 통근 열차의 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크림대교 교량은 차량용과 철도용으로 나누어져 있다. 차량 통행과 교량 부근 선박 운항도 일부 재개됐다.
하루 전인 8일 오전 6시7분께 크림대교 차량용 교량을 지나던 화물 트럭 한 대가 폭발한 뒤 불길이 위쪽 철길을 달리던 연료탱크 열차 7칸에 옮겨붙었다. 이 사고로 최소 3명이 숨졌다. 다만, 불이 옮겨붙은 철도용 교량은 수십미터 구간의 구조물이 불탔음에도 철로 자체가 붕괴되지는 않았다.
크림대교는 길이 19㎞로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로 2018년 차량용이 먼저 개통됐다. 36억달러(약 5조원)가 투입돼 건설된 이 다리는 2014년 3월 이뤄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상징하는 구조물로 2018년 5월 개통식 때 푸틴 대통령은 직접 트럭을 몰고 다리를 건너는 퍼포먼스를 선보일 정도였다. 러시아 본토와 크림반도를 잇는 유일한 다리로 하루 평균 차량 4만대와 기차 47대가 지난다. 러시아의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 뒤부터는 우크라이나 남부인 자포리자주와 헤르손주 등을 침입한 러시아군에 대한 군수지원을 하는 핵심 배후지였다.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면 다리 양방향 통행로 중 한쪽 다리 두 칸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확인할 수 있어, 완전 복구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국방부는 성명을 내어, 남부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러시아군에는 기존의 육로와 해로를 통해 충분히 군수지원이 이뤄질 수 있다며 러시아군의 동요를 막으려 애썼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전략연구소(UISS)의 미콜라 비엘리에스코우는 “러시아군이 헤르손주 등 우크라이나 점령지를 연결하는 해안 지역을 점령하고 있지만 이 지역의 교통 사정은 열악해 군수지원을 케르치 다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며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전쟁연구소는 폭발 사건으로 “러시아군 보급에 상당 기간 지장이 있을 것이지만 우크라이나에 있는 러시아군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짚었다. 심리적·상징적 타격이 더 크다는 분석도 있다. 우크라이나 전 국방장관으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자문을 하는 안드리 자고로드뉴크는 이번 사건이 “러시아 군과 정부의 신뢰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말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전했다.
크림대교를 이전부터 공격하겠다고 별러왔던 우크라이나는 이번 사고를 기뻐했다. 우크라이나 우체국은 기념우표를 발행하겠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관여 여부를 밝히지는 않고 있으나 우크라나가 배후에 있다는 보도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우크라이나 현지 언론인 <우크라인스카 프라우다>는 소식통 말을 인용해 “이번 케르치 다리 폭발의 배후에 우크라이나 보안국이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도 “우크라이나 관리가 우크라이나군 특수부대가 배후에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주거지 폭격 등으로 보복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크림대교 폭발 사고 뒤 8일 저녁과 9일 새벽께 우크라이나 민간인 주거지에 보복성 공격을 가해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9일 연설에서 “러시아군이 자포리자 지역의 일반 주택을 공격해 어젯밤 최소 14명이 사망했다. 어린이 11명을 포함해 70명 이상이 다쳤다”고 밝혔다. “수백 가구가 집을 잃었다. 6층 짜리 건물 전체가 대함미사일(Kh-22)을 맞아 파괴됐다”고 말했다. 10일에는 수도 키이우의 비탈리 클리치코 시장이 키이우 도심에서 여러 차례 폭발이 있었다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9일 “(이번 사고는) 러시아 중요 민간 기반시설을 파괴하기 위한 테러 행위였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계획 입안자, 범인, 그리고 그것을 지시한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의 특수 부대”라고도 말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2008~2012년 대통령)도 “키예프(키이우) 정권이 저지른 테러 및 사보타주가 틀림 없다”며 “러시아의 대응은 테러리스트 제거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10일 <타스> 통신이 전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8일 세르게이 수로비킨 항공우주군 총사령관(대장)을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 작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고 밝혔는데, 그는 시리아 원정군 사령관 시절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별하지 않은 무차별 폭격을 지시했던 잔인한 인물이라고 영국 <가디언>은 평한다. 러시아는 며칠 전 5개 지역군 중 2개 지역군의 사령관을 교체했고 총지휘관으로 그를 임명한 것은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에서 후퇴가 이어지는데 대한 책임을 묻고 전열을 가다듬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러시아 핵 사용 직접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메드베데프 부의장은 지난 7월 우크라이나군이 크림반도를 공격하면 “우크라이나는 ‘종말의 날’을 맞을 것”이라며 핵 사용까지 암시한 바 있다.
크림대교가 폭파된 이튿날인 9일, 두 사람이 크림대교 근처 시베르스키 도네츠크강 유역을 건너려고 보트를 기다리고 있다. AFP 연합뉴스
8일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키이우 시내에 설치된 포토존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크림대교 위의 목화’라 불리는 기념우표 전시물은 지난 8월24일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 기념으로 만들어진 예술 작품의 일부로, 키이우 시내에 설치돼있다. EPA 연합뉴스
김미향, 뱍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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