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0일 총선을 앞두고 반서방·친러시아 기조를 앞세워 지지를 얻고 있는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전 총리가 지난 6일(현지시각) 동부 도시 미할로프체에서 연설하고 있다. 미할로프체/AP 연합뉴스
오는 30일 실시될 슬로바키아의 총선에서 총리 후보로 유력시되는 좌파 정치인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중단과 반서방 기조를 앞세워 지지세를 모아가고 있다. 슬로바키아에 반서방 성향의 정부가 들어설 경우, 유럽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반대 여론이 커지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슬로바키아 사민주의 정당 ‘스메르’(방향-사회민주주의)의 로베르트 피초(59) 대표가 최근 선거운동에서 친러시아, 반서방 기조를 노골화하고 있다고 에이피(AP) 통신이 18일(현지시각) 전했다. 피초 대표는 지난 2006~2010년과 2012~2018년 두번에 걸쳐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가 이끄는 스메르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20%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지난해말 연정 붕괴로 실권한 ‘올라노’(평범한 사람과 독립 인격체)의 지지율은 6%에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피초가 좌파 연정을 구성해 세번째로 총리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피초 대표는 최근 에이피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스메르가 정부에 참여하게 되면, 더는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유럽연합(EU)의 러시아 제재에도 반대했으며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을 몰아낼 능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피초 대표는 “러시아가 (2014년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에서 떠날 것으로 보는 건 순진한 생각”이며 “러시아가 점령한 땅을 포기할 거라는 생각 또한 순진하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또 유럽연합과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영향력을 행사해 러시아와 평화 협상에 나서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슬로바키아가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저지할 것이라고도 공언했다.
슬로바키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에 회의적인 여론이 강한 나라다. 슬로바키아 싱크탱크 글로브세크가 지난 3월 동유럽 8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슬로바키아 응답자의 51%는 우크라이나 전쟁 책임이 서방과 우크라이나에 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절반은 미국이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데 동의했다. 이는 미국에 대한 불신이 강한 불가리아(33%)와 헝가리(25%)보다도 월등히 높은 수치다. 글로브세크의 카타리나 클린고바 선임 연구원은 “다수의 슬로바키아 정치인들이 러시아가 퍼뜨리는 주장과 그들의 용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연합 회원국 가운데 친러시아 성향을 보이는 정부는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이끄는 헝가리 정부가 유일한데, 피초가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대러시아 정책을 둘러싼 유럽연합 내 갈등이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유럽연합의 우크라이나 개입에 회의적인 독일·프랑스 등의 극우 정당들도 높은 지지를 얻고 있어, 전쟁이 길어질수록 유럽에서 반서방·친러시아 여론이 강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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