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5일 포르투갈 리스본의 의사당에서 열린 제17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서 호베르투 메릴 대변인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옛날에 ‘노예가 해방되면 좋은지 알아보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을 수 있다. 지금은 노예제도를 말하면 그런 취급을 받는다. 기본소득 실험도 마찬가지다.”
9월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제17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의 호베르투 메릴 대변인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기본소득을 노예해방에 비유했다. 한때 ‘미친 생각’이었던 노예해방이 지금은 불가역적 진리로 인식되는 것처럼, 1797년 토머스 페인이 <토지 분배의 정의>에서 처음 제시한 이래 이상주의로 치부돼온 기본소득도 조만간 상식으로 자리잡으리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메릴은 “전세계의 많은 곳에서 기본소득 도입 실험이 진행중”이라며 “올해는 좀 더 현실적인 총회가 되는 데 주력했고, 이를 발판으로 내년엔 포르투갈에서 세계 기본소득 파일럿 프로젝트 학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서울 총회를 이끌고 올해 리스본 총회에도 참가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관계자들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배경을 ‘실현 가능성’에서 찾았다. 금민 이사는 “담론 수준이었던 기본소득 논의가 현실적 제도 설계로 발전했다”고 평가했고, 안효상 상임이사는 “그래서 총회 제목이 기본소득 실험”이라고 맞받았다. 박선미 사무국장은 “부결되긴 했지만 지난해 스위스의 기본소득 도입 국민투표 이후 지구촌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고, 지난 1월 핀란드가 국가 단위로는 처음으로 기본소득 실험을 시작하면서 ‘곧 시행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졌다”고 짚었다.
리스본 총회에서는 <한겨레>가 연재해온 ‘세계는 지금 기본소득 실험중’ 시리즈에서 소개한 케냐, 캐나다 온타리오주, 핀란드, 미국 실리콘밸리의 실험 외에도 각국의 다양한 정치·사회 활동과 시도들이 소개돼 주목받았다.
지난 9월25일 포르투갈 리스본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제17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독일에서는 1년 전 기본소득 도입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본소득당’이 만들어졌다. 인공지능(AI)으로 인해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믿는 한 정보기술(IT) 업계 종사자가 아이디어를 냈고, 서로 다른 직업적·지역적 배경을 가진 32명이 창립 멤버가 됐다. 리스본에서 만난 코지마 케른 기본소득당 부대표는 아직 스스로를 정치인 대신 ‘정치와 연계된 시민’으로 부른다. 그는 “독일에서 기성 정당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하지 않고, 한때 녹색당과 좌파당이 관련 정책을 도입하려 했으나 실행에 옮겨지지 않아 많은 이들이 좌절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본소득운동을 위해 정당을 만든 것이지 정당을 만들려고 기본소득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리스본 총회 사전행사인 리셉션이 한창이던 9월24일, 독일에선 총선이 치러졌다. 기본소득당은 의회 입성에 필요한 5%에 한참 못 미치는 0.21% 득표에 그쳤다. 하지만 케른 부대표는 42개 정당이 난립한 가운데 대규모 선거운동 없이도 10만표나 득표했다며 “만족한다”고 자평했다. 특히 42개 정당 중 11개 정당이 기본소득에 찬성해, 군소정당들이 힘을 합치면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훨씬 더 큰 세력이 되리라 기대한다.
독일 기본소득정당 코지마 케른 부대표가 지난 9월26일 포르투갈 리스본 제17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전체 기본소득 터키’를 중심으로 택시기사들과 약사들에게 기본소득을 알리고 전화와 메신저 앱으로 조직화하는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자동화로 수년 내 타격을 받으리라 예상되는 직업군을 대상으로 한 ‘타깃 캠페인’이다. 터키 사례는 아니지만, 자율자동차가 상용화되면 미국에서만 트럭 운전사 350만명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추산도 있다. 운전사들이 쉬어가는 패스트푸드 업소와 면허시험장, 교통경찰관 등 180여종의 연관 직업이 사라지리란 전망도 나온다.
이스탄불에는 1만8200대의 택시와 4만명의 택시기사가 등록돼 있다. 대부분의 택시가 수백개 택시 휴게소와 연계돼 있고, 휴게소별로 많게는 수백명의 기사가 적을 두고 오간다. ‘전체 기본소득 터키’는 기사들이 많은 심야에 휴게소를 방문해 기술 발전, 이미 진행된 실직, 머지않은 미래에 다가올 실직에 대해 질문하는 방식으로 기본소득을 알린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은행 지점 직원들을 대체한 사례를 예로 들거나, 짧은 동영상이나 책자도 함께 본다. 약국이 약상자에 바코드를 입력하는 자판기 영업 형태로 나아간다는 점을 고려해 이스탄불의 6500개 약국 약사와 직원들을 상대로도 캠페인을 벌인다.
‘전체 기본소득 터키’의 활동가인 알리 쾨일뤼오을루가 지난 9월25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전체 기본소득 터키’의 알리 쾨일뤼오을루는 <한겨레>와 만나 “기본소득을 정착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캠페인이며, 정치인보다 대중을 먼저 설득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택시기사와 약사는 미래에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 직업인데다, 손님들과 정치 얘기를 많이 나누는 사람들이다. 설득시킬 수만 있다면 가장 강력한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리스본/글·사진 전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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