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기념촬영을 하며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방한 일정이 7~8일로 정해지면서 일본 총리로서 5년3개월 만에 한국을 찾는 그가 들고 올 메시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굴욕 외교’ 비난을 감수해가며 양보안을 내놓은 만큼 일본의 ‘상응하는 화답’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지만, 이를 기대하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이번 방한이 공개된 방식이다. 정상의 외국 방문 등의 일정은 외교당국 간 논의를 거쳐 양국에서 동시에 발표가 이뤄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번엔 두차례에 걸친 일본의 ‘일방 발표’라는 파격의 파격을 거듭한 끝에 확정됐다.
기시다 총리의 방한 일정이 처음 공개된 것은 지난달 30일 <요미우리신문> 보도를 통해서였다. 일본 정부가 자국 언론에 미확정 상태의 ‘민감한 정보’를 흘려 기시다 총리의 방한 일정을 ‘기정사실’로 만든 셈이다. 물론 이는 일본이 예민한 외교 일정을 정할 때 자주 써먹는 수법이다. 윤 대통령의 3월16일 방일도 3월6일 <교도통신>을 통해 첫 보도가 나온 바 있다. 하지만 당시엔 사흘 뒤 양국 정부가 나란히 동시에 공식 발표를 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왼쪽)가 1일 가나 수도 아크라에 있는 코토카 국제공항에 도착해 마하무두 바우미아 가나 부통령과 함께 걷고 있다. 아크라/AFP 연합뉴스
이번엔 사정이 크게 달랐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1일(한국시간 2일 오전) 방문지인 아프리카 가나에서 기자들과 만나 “제반 사정이 허락한다면 7~8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방향으로 조정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본인 스스로 “제반 사정이 허락한다면” “조정이 진행 중”이라고 밝혔듯 미확정 상태인 일정을 일방적으로 발표해 한국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무언의 압박’을 가한 셈이다. 결국 대통령실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참석하는 이달 19~21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와 한·미·일 3개국 정상회의를 앞두고 관계 개선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대통령실과 일본 외무성은 2일 오후 3시께 의제를 밝히지 않은 짤막한 보도자료를 내어 기시다 총리의 방한 일정을 공식 발표했다.
방한 일정을 가로막은 ‘제반 사정’은 무엇이었을까. 한·미·일 3각 협력을 중시하는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의 방한이나 일정에 반대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다만, 한국 국내 여론을 생각해야 하는 대통령실이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의 ‘결단’에 호응하는 ‘사과 메시지’를 가져오도록 유무언의 방식으로 요구했을 수 있다. 한·일 전문가들 역시 이번엔 기시다 총리가 성의를 보일 차례라는 의견을 쏟아내는 중이다.
하지만 일본 정치로 눈을 돌려보면 상황이 녹록지 않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달 23일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와 통일지방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자민당보다 이념적으로 더 오른쪽에 있는 일본유신회의 약진에 잔뜩 긴장해야 했다. 다음날 <아사히신문>의 1면 제목은 ‘방심한 자민당, 예상외의 고전’이었다. 지역구인 히로시마에서 주요 7개국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중의원을 해산해 ‘장기 정권’의 기반을 마련하려던 셈법이 다소 뒤틀린 셈이다.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는다’는 신중한 성격의 기시다 총리가 이번에도 지지율에 해가 되는 ‘결단’을 회피했을 수 있다.
대통령실도 말을 아꼈다. 이도운 대변인은 “한-일 간에 많은 현안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안보·경제협력 문제다. 그 부분 위주로 논의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3~4일 서울에서 열리는 조태용 국가안보실장과 아키바 다케오 국가안전보장국장 간 회의에서 ‘마지막 설득’에 나설 것으로 보이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긴 어려워 보인다.
길윤형 김미나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