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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특파원 칼럼] 퇴행의 시대 / 길윤형

등록 2017-01-19 18:33수정 2017-01-19 20:31

길윤형
도쿄 특파원

지난 3년 3개월 동안 만났던 일본인들 가운데 말이 잘 통했던 이들은 대개 80대 이상의 할아버지들이었다. 2014년 6월 일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와 진행했던 대담이 기억난다. 1935년 시코쿠 에히메현에서 태어난 오에는 9살 때 패전을 맞는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의 학교에서 이뤄지고 있던 것은 “빨리 어른이 되어 일왕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군국주의 교육이었다. 패전의 공허감 속에서 방황하던 오에의 앞에 등장한 것은 일본의 새 헌법이었다. “당시 학교 선생님이 새로 만들어진 헌법에는 ‘개인의 권리에 관한 내용과 앞으로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가 들어 있다’는 얘길 해줬다. 그래서 매우 큰 희망을 가졌고 공부를 해 대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1927년생인 히라오카 다카시 전 히로시마 시장은 유년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그는 경성중학교(현 서울고) 재학 시절 “당시 교육엔 일종의 조선인 멸시 같은 게 있었다. 학교에선 ‘우린 일본인이니까 조선인들에게 비웃음을 사면 안 된다’는 것을 늘 가르쳤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선 최초로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대해 보도했고, 시장 재직 때인 1991년 ‘히로시마 평화선언’에 “일본은 예전 식민지지배와 전쟁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겼다”는 내용을 써 넣었다. 1918년생으로 이제 100살을 바라보는 ‘보수’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마저 2015년 8월 일본은 “중-한 양국과의 역사 알력엔 신중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 민족이 입는 상처는 3대 10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본이 저지른 침략의 역사를 직접 경험했으며, 그렇기에 한국에 대해 늘 미안한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온 일본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은 이제 늙거나 대부분 숨졌다.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이제 일본의 주류는 1940년대 후반~1960년대 출생한 이들이다. 한반도에 대한 이들의 정서를 보여주는 2개의 보고서가 있다. 하나는 ‘아베 담화’를 발표하기 직전, 아베 총리가 만든 전문가 모임인 ‘21세기 간담회’가 내놓은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해 “1920년대엔 경제성장도 실현됐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 가혹화됐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 언어에선 지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나 반성의 정서를 읽을 수 없다. 보고서가 그 대신 길게 기술한 것은 노무현 정권을 이끌던 ‘386세대’의 반일 감정이었다. 한국이 ‘이성’적으로는 일본과의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정’적으로는 반일적 역사 인식에 휩쓸리고 만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보고서는 세계평화연구소가 지난 12일 발표한 ‘미국 신정권과 일본’이라는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북핵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한-미-일이 “끊임없이 협력”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보고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본 정부한테 북한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반격 능력’(적기지 공격 능력)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안달을 낼까. 원인은 다시 한국이다. 일본 주류의 마음속 깊은 곳엔 “언젠가 우리를 배신하고 중국에 붙어버릴” 한국에 대한 깊은 ‘전략적 불신’이 자리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12·28 합의의 처리를 두고 한-일 양국 모두에게 힘든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많은 이들로부터 비난당할 각오를 하고 내리는 개인적인 결론은 ‘아베의 일본’한테 한국이 무언가 추가적인 조처를 끌어내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본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긴 힘들 것이다. 이 덩치 크고, 자기중심적인 이웃과 어떻게 사귀어야 할까.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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