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범 |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
중대재해처벌법은 제정된 날로부터 1년 뒤인 2022년 1월부터 시행된다. 그런데 벌써부터 법의 효력이 발생되고 있다. ‘기업 하다 보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던 한국 사회에 ‘사람이 죽으면 앞으로는 큰일 난다’는 생각이 더 확산되도록 하고 있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중대재해처벌법은 중대재해가 발생했다고 경영자를 곧장 구속하거나 그런 법이 아니다. 위험이나 결함을 알면서도 방치한 ‘무책임한’ 경영자를 처벌하는 법률이다. 즉, 안전을 위해 노력한 경영자는 처벌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업들은 어떤 노력을 하면 경영자가 처벌되지 않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최근 어느 로펌의 중대재해처벌법 온라인 세미나에 기업 관계자 3천명가량이 접속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게다가 중대재해처벌법은 중대산업재해와 중대시민재해를 모두 처벌하도록 했다. 화학물질 취급 사업장에서 폭발 사고가 나서 주민이 사망하거나 가습기살균제 같은 제품으로 소비자가 사망하는 경우도 처벌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산업 현장의 안전뿐 아니라 제품 안전까지 경영자가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사회 안전을 위해 너무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중대재해처벌법의 이러한 입법 취지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도 줄여버리고 경영자가 해야 할 노력도 아주 협소하게 규정하는 시행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는 가습기살균제 참사 같은 사고가 다시 발생하더라도 ‘규정이 없어 처벌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또 하게 될 것 같아 답답하고 속이 상한다.
중대재해처벌법 제9조는 경영자로 하여금 ‘원료나 제조물의 설계, 제조, 관리상의 결함으로 인한 그 이용자 또는 그 밖의 사람의 생명, 신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재해예방에 필요한 인력·예산·점검 등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이행하도록 했다. 이것을 하지 않다가 소비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나면 중대재해처벌법으로 경영자가 처벌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번에 입법예고된 시행령에서는 원료나 제조물에 대해 안전을 확인할 절차를 두어야 할 대상을 별표5로 국한했다. 다시 말해 모든 원료나 제조물이 아니라 별표5에 해당하는 원료나 제조물만 안전 확인 절차를 두면 된다는 뜻이다. 별표5에는 고압가스, 사고대비물질, 살생물물질, 마약, 농약 등이 제시되어 있다. 눈을 씻고 살펴봐도 소비자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제품들은 찾아볼 수 없다. 법에서 시행령에 위임한 것은 원료나 제조물의 안전관리 체계를 구체적으로 정하라는 것이었는데, 시행령 별표5를 통해 원료나 제조물의 범위를 새로 정해버렸다. 시키지도 않은 것을 한 셈이고, 국회의 입법 의도를 행정부가 훼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제조물책임법에서는 제품의 결함을 확인할 책임을 기업에 주고 있고, 결함을 알면서도 관리하지 않을 경우 징벌적 배상을 하도록 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결함을 어떻게 확인하라는 규정은 없지만, 기업들은 그 방법을 찾아서 스스로 하고 있다. 생활화학제품이나 공산품 관리법에서 제품안전담당자나 제품안전시스템을 명시하지 않더라도 많은 기업이 스스로 제품 출시 전 안전을 확인하고 안전사용법을 소비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온 이유다. 그런데 이번에 정부가 제시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에 따르면 별표5에 정하지 않은 제품에 대해서는 제품안전을 확인할 절차를 두지 않아도 처벌하지 않게 해버렸다. 중대재해처벌법을 계기로 기업이 제품안전을 확인해야 할 책임이 더 구체적으로 마련될 것이라 기대했더니, 오히려 기존의 노력조차 안 해도 되는 것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중대시민재해라는 아직은 낯선 개념이 법에 등장할 때부터 예견된 것이다. 그리고 법에서 정할 것을 시행령으로 과도하게 위임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10만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청원을 하여 만든 중대재해처벌법이다. 법률의 취지를 훼손하는 시행령 별표5를 삭제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