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아래 글은 <한겨레> 11월30일치 ’삶의 창’ 코너에 실린 전범선(가수·밴드 ‘양반들’ 리더)의 칼럼‘민사고는 없어져야 하는가’를 읽고 보내온 독자의 글입니다. 두 사람은 민사고 동문으로, 자사고 폐지 이슈에 대한 견해를 보내왔습니다.
이대한 ㅣ 미국 노스웨스턴대 분자생물학과 박사후연구원
내 아버지는 전교조 교사였다. 민족사관고(민사고)에 입학하면서 나는 아버지의 자기모순이 되었다. 아버지는 평생 내게 단 한 번도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신 적이 없었다. 대신 늘 “다른 사람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셨다. 그런 가정교육을 받아온 나에게 “조국을 위해 헌신하라”는 민사고의 지향은 아무런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한복을 입히고 ‘영어 상용’을 시행하는 학교의 철학도 누군가에겐 모순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고심 끝에 다다른 실용주의였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링구아 프랑카(국제공통어)인 영어를 갖춰야 한다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에 의거한 결단이었다. 똑똑한 학생들은 민족주의의 세뇌를 받지도, 사대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나름의 실용주의를 발전시켜나갔다.
입학 오리엔테이션에서 교장 선생님은 명문대 진학률을 광고하는 대신, 입시를 위해서라면 다른 학교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교 1, 2등을 다투던 학생들을 모아둔 학교에서 좋은 내신을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동급생들의 내신은 모두 하향 평준화되었고, 의대에 뜻이 있었던 친구 여럿이 학교를 떠났다.
학교는 수능 준비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로 방해하는 편이었다. 수능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책들을 읽히고, 가나안농군학교나 꽃동네 같은 곳으로 데려갔으며, 시조를 짓고 활을 쏘게 했다. 나는 도민체전에서 횡성군 대표로 금메달을 따 오느라 모의고사를 망치기도 했다.
입시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학교였지만 공부하기엔 천국이었다. 어떤 친구는 주말 동안 대치동 학원으로 원정을 떠났지만 나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생물 교사 세분이 모두 ‘박사님’이셨다. 나는 그들에게서 교과서 바깥의 지식을 흡수했고, 생물학에 매료되었고, 의대에 진학하는 대신 그들의 뒤를 따라 생물학 박사가 되었다.
학교는 놀기에도 천국이었다. 온갖 동아리들이 있었고, 동아리 활동을 할 시간도 많았다. 다만 교육 시스템의 차이가 잘 노는 애들과 그렇지 못한 애들을 갈라놓았다. 나는 국내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민족반 소속이었다. 민족반 학생들에게 동아리 활동은 입시 준비라는 기회비용의 지출을 의미했다.
반면 국제반 학생들에게는 노는 것도 ‘스펙’의 일부였다. 꾸준히 스포츠나 예술 활동을 하고, 리더십을 발휘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외국 대학의 중요 평가 요소였다. 국제반 친구들은 시도 때도 없이 새로운 동아리를 만들었다. 멋진 에세이를 쓸만한 이야기도 그 과정에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내신과 수능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우리보다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하는 국제반 친구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내가 안에서 지켜본 민사고의 성공 비결은 단순했다. 그것은 방임에 가까운 존중이었다. 교사들은 학교의 영문 이름 ‘Korean Minjok Leadership Academy’에 걸맞게 학생들을 미래의 리더로 존중해주고, 잠재력을 믿어주었다. 통제하려 하기 보다는 방임하면서도, 요청이 있을 땐 언제든 도와주려 했다. 물론 그곳에서도 경쟁이 치열했지만, 수능이나 내신 성적으로 줄세우기를 당하고, 점수에 따라 귀천이 가려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민사고라는 좋은 땅에 뿌려진 많은 씨앗은 저대로 잘 자라나 다양성을 꽃피웠다.
모든 친구는 각자 여러 부분에서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 서열화가 불가능했다. 나는 민사고에서 겸손을 삶으로 배웠다. 세상에 나보다 똑똑하고 유능한 친구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일찍 배운 것은, 어쩌면 내가 민사고에서 배운 가장 값진 가르침이었을지 모른다. 이길 수 없는 강력한 경쟁자들을 만나면서 경쟁에 골몰하는 대신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뭔지 고민하게 됐다. ‘소질과 적성에 따른 진로를 택하자’는 교훈의 구절이 아니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민사고는 없어지는 게 맞다”는 전범선 동문의 <한겨레> 칼럼
이 나가고 동문 사회에서도 당연히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모교를 없애자는 환영받기 어려운 이야기임에도 그의 뜻에 공감을 표하거나, 공감하지 않더라도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고 지지하는 동문이 무척 많았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받아온 동문들다웠다. 사실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고민하고, 가슴 아프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모교가 사라져도 좋다는 용기 있는 발언을 할 수 있는, 전범선이라는 동문 자체가 민사고라는 공동체가 가꿔온 다양성의 귀한 꽃 한송이다.
동문 사회의 토론을 지켜보면서,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고민하고, 가슴 아프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모교가 사라져도 좋다는 용기 있는 발언을 할 수 있는 전범선을 길러내는 학교는, 그런 발언을 하는 선배 혹은 후배를 응원하고 보호하는 공동체는, 해체할 것이 아니라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사고는 귀족학교’라는 문제는 실존하는 문제다. 전국구 학교였지만 나처럼 지방 출신은 소수였고 강남, 분당, 목동에서는 동네 친구들이 몇명씩 함께 입학했다. 부유한 친구들의 가정과 달리 우리 집은 저축을 하는 집이 아니라 대출을 갚는 집이었다. 재정 위기를 겪는 민사고 재단이 올린 등록금과 기숙사비만큼 우리 집의 빚도 늘어갔다. 누군가 귀족학교라고 부르는 곳에 입학한 서민 자녀에 대한 경제적 형벌이었다. 나는 형벌을 투자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민사고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심화하는 기제의 일부로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라면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면 된다. 내 아버지처럼 자기모순을 무릅쓰지 않더라도, 내 어머니처럼 경제적 곤궁을 견뎌내야 하지 않더라도 자녀들이 민사고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거나, 더 나아가 민사고에 입학하지 않더라도 내가 받은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공교육을 혁신하면 된다.
“고심 끝에 해경 해체”라는 결단에서 ‘해체’가 ‘고심’을 부정하는 모순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민사고가 없어진다고 공교육이 혁신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문제를 풀어야지, 문제가 어렵다고 문제를 없애는 것은 쉽지만 어리석은 수다.
전범선은 늘어나야 한다. 전범선들을 길러내는 학교도 늘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민사고가 더는 특별한 학교가 되지 않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민사고를 없애는 것보다는 어려운 길이지만 그것이 더 창조적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