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남아프리카공화국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에서 벌어진 ‘백신 공급 확대’ 촉구 시위에서 참가자가 ‘우리는 백신을 원한다’고 쓴 손팻말을 든 채 행진하고 있다. 프리토리아/AFP 연합뉴스
지난 4월, ‘백신 레이스’의 선두 그룹에 있던 나라들은 ‘코로나19 탈출’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다. 백신 접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확진자 수가 현저하게 줄었기 때문이다. 국내 언론에도 ‘백신 부국’들의 일상 회복 소식을 전하는 기사들이 잇따라 실렸다. ‘백신이 돌려준 영국의 일상…부럽네요’, ‘마스크 벗고 대규모 모임…영국·이스라엘 일상 복귀 실험’, ‘백신 강국들의 환호’….
그러나 그 무렵 인도에서는 불행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3월 중순부터 확진자가 급증한 게 전조였다. 4월 들어서는 하루 확진자가 10만명으로 치솟더니, 마침내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의 존재가 확인됐다. 지금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델타 변이’다. 당시에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유행이 심각한 곳에서 언제든 변이 바이러스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한 나라에서 ‘코로나 종식’을 선언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경고가 잇따랐지만, 백신 부국들은 샴페인을 터뜨리기 바빴다.
전문가들의 경고가 현실화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월 하순 이후 감소세로 돌아서 6월 중순 20만~30만명대까지 떨어졌던 전세계 확진자 규모가 6월 하순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60만~70만명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미국·영국·이스라엘 등 ‘백신 부국’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따라 영국을 뺀 대부분의 나라들이 마스크 착용을 다시 의무화하는 등 일상 회복 조처를 부분적으로 되돌리는 중이다.
물론 유행의 양상은 이전과 큰 차이가 있다. 피해가 백신 미접종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점이 그렇다. 전체 국민의 50%가량이 2차 접종까지 마친 미국의 경우 확진자와 사망자의 99%가 미접종자다. 전파력이 강한 델타 변이가 백신 미접종자들을 무섭게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접종자에게도 더러 돌파 감염이 발생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백신이 중중·사망 예방에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전세계 ‘백신 레이스’ 현황을 보여주는 ‘블룸버그 백신 트래커’는 현재의 유행 양상을 “백신 미접종자의 팬데믹”이라고 표현했다.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위험에 처해 있다는 얘기다. ‘백신과 바이러스의 사활을 건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고도 했다.
이런 상황은 백신 격차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드러내준다. 바이러스와 싸울 무기가 없는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뉴스 채널 <시엔엔>(CNN)은 최근 “다른 곳에서는 절박한 이들이 백신 부족으로 죽어가는데, 부유한 국가들은 ‘백신 무기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최근 들어 백신 접종률이 낮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서태평양 지역에선 확진자와 사망자 증가세가 가팔라지고 있다. 국제 통계 사이트인 ‘아워 월드 인 데이터’ 집계를 보면, 인구 대비 백신 접종 완료 비율이 60%를 넘는 나라가 29곳인 반면, 19개 나라는 아직 1%가 채 안 된다. 백신을 한 차례라도 맞은 사람 비율이 북미와 유럽은 52%에 이르지만 아프리카는 4.3% 수준이다.
델타 변이 확산으로 백신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지만, 이는 백신 불평등 완화가 한동안 더 어려워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백신 부국’들이 자국민 ‘부스터 샷’(추가 접종)을 위해 ‘백신 곳간’을 더 걸어 잠글 것이기 때문이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지난 4일 언론 브리핑에서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전세계 백신의 대부분을 사용한 국가들이 백신을 더 쓰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최소한 9월 말까지는 ‘부스터 샷’을 중단해달라고 촉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9월 말은 세계보건기구가 지난 5월 ‘모든 나라의 인구 최소 10%에게 백신을 접종하자’고 호소하며 목표 달성 시점으로 제시한 기한이다.
그의 호소에도, 부자 나라들은 ‘백신 국가주의’를 포기할 뜻이 전혀 없어 보인다. 마치 팬데믹의 ‘종점’이 국경 안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이 이미 추가 접종을 시작했고,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은 다음달부터 접종을 시작한다. 자국민 접종이 충분히 이뤄지면 남는 백신을 기부하겠다던 이전의 약속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백신 불평등을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백신 관련 지적재산권을 유예해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모든 나라에 백신에 대한 공평한 접근을 보장하는 것인데, 부자 나라들은 자국 제약업체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이마저도 반대한다.
그러나 전세계적 재난인 팬데믹 상황에서 ‘각자도생’은,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 아프리카를 비롯해 코로나19가 창궐하고 있는 지역에서 델타보다 더 센 변이가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새로운 변이가 그 지역에만 머물 리도 만무하다. 바이러스에게 국경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며칠 전, 감염병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백신을 회피하는 새로운 변이의 출현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며 “새로운 변이가 팬데믹과의 전쟁을 1년 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면역은 전세계적 공공재”(지난해 11월, G20 정상회의 공동성명)라는 합의를 계속 외면한다면, 인류는 한동안 변이 바이러스에 따른 재유행 반복이라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종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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