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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파원 칼럼] 중국과 리투아니아, 주권의 무게

등록 2021-08-26 17:57수정 2021-08-27 02:35

정인환|베이징 특파원

중국 외교부가 자리한 베이징의 차오양구는 인구가 많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345만2460명, 16개구 가운데 단연 1위다. 언젠가 외교 소식통이 농반진반으로 들려준 일화가 있다.

중국 외교부 유럽 담당자가 각국 외교관을 만나 자국의 ‘눈부신 성과’를 소개했다. 한 외교관이 인권 등 문제점을 거론했다. 외교부 관계자가 대뜸 “귀국의 인구는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수치를 답하자 이렇게 말했단다. “차오양구보다 적네요.”

유럽연합 27개 회원국 가운데 차오양구보다 인구가 적은 나라는 7개국이다. 몰타·룩셈부르크는 100만명 이하고, 키프로스·에스토니아·라트비아가 100만명대다. 200만명이 넘는 국가는 슬로베니아와 리투아니아 2개국이다. 일화에 등장하는 외교관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

차오양구보다 인구가 150만명가량 적은 발트해 연안국 리투아니아가 최근 뉴스의 중심에 섰다. 지난달 수도 빌뉴스에 개설된 ‘대만 대표처’ 때문이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미수복 지역’인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의 수교국은 사실상 대만의 외교공관임에도 대만 대신 수도인 타이베이를 앞세워 ‘주한국 타이베이 대표부’, ‘주미국 타이베이 경제·문화 대표처’ 식으로 표기한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10일 “주권과 영토 보전을 심각히 침해했다”며 선즈페이 리투아니아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했다. 이튿날엔 막 귀임해 전날부터 3주 격리에 들어간 디아나 미츠케비치에네 리투아니아 대사에게 격리가 끝나는 대로 출국하라고 통보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단교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올해 들어 리투아니아는 선명한 대중국 행보를 이어왔다. 의회는 중국의 신장위구르 정책을 ‘반인도적 범죄’이자 ‘인종학살’이라고 비판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외교부는 “실익은 없고 회원국 간 갈등만 조장한다”며 중국과 중·동부 유럽 각국의 경제협력체인 ‘17+1’ 탈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리투아니아는 유럽의 대표적인 친중국 국가였다. 미 퓨리서치센터가 2019년 6월10일~7월22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리투아니아 응답자의 45%가 중국에 ‘호감’을 표시했다. 같은 조사를 한 34개국 평균치(40%)보다 높다. 비호감이란 응답은 33%로 평균치(41%)보다 낮았다. 리투아니아의 갑작스러운 변심 이유는 뭘까?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송환법 반대 시위로 뜨거웠던 2019년 8월23일 저녁 홍콩 도심에 약 60㎞ 길이의 인간 띠가 만들어졌다. ‘홍콩의 길’ 시위다. 같은 날 빌뉴스에서도 홍콩 시민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날은 리투아니아에서도 의미 깊은 날이었다. 소련에 속했던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등 발트3국 시민 200여만명이 독립을 열망하며 무려 670여㎞에 이르는 ‘발트의 길’ 시위를 벌인 지 꼭 30년째를 맞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시위 현장에서 사달이 났다. 오성홍기를 든 중국인들이 맞불 시위에 나섰다. 당시 <리투아니아방송>(LRT)은 “중국대사관 차량이 깃발 등 시위용품을 실어 날랐고, 대사관 소속 외교관과 함께 선즈페이 대사까지 현장에서 목격됐다”고 전했다. 리투아니아 독립을 촉발한 시위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중국의 ‘관제 시위’가 벌어진 게다.

중국은 리투아니아에 대한 압박을 이어가고 있다. 유럽 각국도 이를 지켜보고 있다. 중국의 행보에 맞춰 유럽연합 차원의 공동 대응이 이뤄질 수도 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주권의 무게는 인구수와 비례하지 않는다. 존엄의 크기도 마찬가지다.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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