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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무릎 우산’ 사진이 말하지 않은 것들 / 안영춘

등록 2021-09-02 17:31수정 2021-09-03 02:39

강성국 법무부 차관이 지난달 27일 오전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아프가니스탄 현지인 조력자 초기 정착 지원 관련 브리핑을 하는 가운데 한 법무부 직원이 뒤에서 무릎을 꿇고 우산을 받쳐주고 있다. 연합뉴스
강성국 법무부 차관이 지난달 27일 오전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아프가니스탄 현지인 조력자 초기 정착 지원 관련 브리핑을 하는 가운데 한 법무부 직원이 뒤에서 무릎을 꿇고 우산을 받쳐주고 있다. 연합뉴스

안영춘|논설위원

‘무릎 우산’ 사진의 첫인상은 아득할 만큼 초현실적이었다.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앞에서 찍었다는 <연합뉴스>의 원본 사진에는 ‘꼭 이래야만 하는지…’라는 차분한 제목이 달렸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라는 듯이. 그러나 이미지의 의도는 빛의 속도로 초과 달성됐고, ‘황제 의전’이라는 작명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일부 언론은 ‘2021년, 이 정부가 인권을 말하는 순간’이라는 둥 문재인 정권으로 화살을 돌렸다.(<조선일보> 8월28일 1면 사진 제목) 이에 맞장구를 두드린 국민의힘 대선 후보들은 수행원한테서 황망히 우산을 받아 들거나 아예 비를 가리지 않는 연출로 정치적 반사이익을 꾀했다.

사진의 첫인상이 초현실적이었던 사정은 뒤늦게 감지됐다. 충북 지역의 한 언론이 사진 프레임 밖에서 벌어진 일들을 편집되지 않은 현장 영상과 함께 보도했다. 기자들의 요청으로 브리핑 장소가 취재 인원이 제한된 실내에서 폭우가 퍼붓는 실외로 옮겨졌고, 법무부 차관 옆에서 우산을 받쳐 든 공무원은 ‘화면발’을 위해 차관 뒤로, 다시 차관 어깨 아래로 이동 배치됐으며, 어느덧 공무원은 무릎을 빗물 고인 바닥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거였다. 초현실적 갑질에 의한 초현실적 상황 전개로 초현실적 장면이 연출된 맥락이야말로 날것의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진은 모든 맥락을 소거한 채 피사체에 영점조준 해 총격을 가했다.

빛의 속도로 퍼진 사진에 견주면 날것 그대로의 사실이 전파되는 속도는 달팽이걸음이나 다름없다. 대다수 언론이 아예 사실을 사실로서 간주하지조차 않는 탓이 크다. 그저 달팽이 집의 나선형 무늬를 따라 침묵 속으로 말려들거나, 심지어 시치미 뚝 뗀 채 예의 비판만 사골 국물 끓이듯 되풀이하고 있다. 더러 사실을 부분적으로 언급하는 언론도 차관이 직접 우산을 들었어야 한다거나 언론의 요청을 거부했어야 한다며, 권위적 관료주의 문화를 질타했다. 차관과 일행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속내야 어떻든 차관이 사과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언론이 사진과 관련 보도를 비판하고 성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릎 우산 사태는 언론중재법 정국과 시기가 공교롭게 겹쳤다. 일부에서는 무릎 우산 사태를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담긴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필요한 근거 사례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사진을 보고 ‘황제 의전’을 떠올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즉자적인 인상평에 불과하다. 우선, 고위 공직자인 법무부 차관은 지난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법안의 청구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제의 사진과 관련 보도들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교정하는 데도 딱히 법안의 쓸모를 찾기 어렵다. 설령 일반인에게 가짜뉴스 피해에 대한 실질적인 구제 효과가 미친다고 해도, 언론개혁의 본질적 심급과는 거리가 멀다.

‘가짜뉴스 피해구제법’이라며 입법을 밀어붙이려는 쪽이나 ‘언론 재갈법’이라며 결사반대하는 쪽이나 과도한 상징에 몰입해 있다. 언론자유도 언론개혁도 징벌적 손해배상을 아득히 초과하는 복잡한 가치다.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아포리즘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 재임 때 “아무것도 읽지 않는 사람이 신문만 읽는 사람보다 교육이 더 잘돼 있다”고 말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프랑스 대문호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쓴 공개편지 ‘나는 고발한다’는 언론자유의 실천 사례로 꼽히지만, 편지에 ‘추악한 언론들’이라고 표현한 사실은 함께 언급되지 않는다.

무릎 우산 사태는 취재에서부터 보도와 논평, 선택적 침묵에 이르기까지 언론개혁의 절박한 필요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최근의 사례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침몰하는 세월호 앞에서 벌어진 팽목항 ‘보도참사’가 동일한 구조 속에 반복되고 있다. 또한 언론중재법 입법 갈등은 언론자유와 언론개혁의 사유가 제퍼슨과 졸라가 살던 18, 19세기 서구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조건에서 여야 합의로 구성될 ‘언론중재법 8인 협의체’에 기대를 거는 건 초현실적일까. 협의체의 한계를 단언한 언론현업단체들 가운데 한 곳에서라도 무릎 우산 사태에 대해 짧게나마 입장문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도.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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