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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손펼침막 들고 동참한 대행진

등록 2021-11-17 18:09수정 2021-11-18 02:31

드디어 민회를 시작했다. 농촌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의제를 놓고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는 자리였다. 농촌의 주민자치에 대한 의견이 대두되었다. 괴산군에 800여개의 단체가 있다는 것에 놀라고, 의사결정 위원회에 농민은 15%에 불과하다는 통계에 또 놀랐다. 농업군에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농민이 15%라니, 그럼 농민을 제외하고 누가 결정한다는 말인가.

[엄마아들 귀농서신] 조금숙|괴산서 농사짓는 엄마

밤새 자분자분 비가 내렸다. 행진이야 우산을 쓰고라도 하면 되겠지만, 날씨를 핑계 삼아 모임 자체를 안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내 일도 아닌데, 나만 걱정한다고 될 일도 아닌데 새벽에 잠이 깨어 낙숫물 소리 따라 심정을 볶았다.

행진은 전남 해남을 거쳐 곡성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괴산에서도 예닐곱 단체가 추진위원회를 꾸려 몇차례 준비 회의를 했다는데, 주변에 내용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농산어촌의 어려움을 위한 행진이라는 소식을 듣고, 머릿수 하나 보탠다는 마음으로 참가하겠노라 공언했다. 후에 사이트에 올라온 유튜브 영상을 보니 꼭 참가해야 할 내용이었다. 오늘날 농촌의 문제는 농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절대적으로 공감되었다. 지난번에 아빠와 네가 말했듯이 농촌은, 괴산은 초고령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일손이 부족하여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감당을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다. 지금의 연세 드신 분들이 일손을 놓으면 농촌 사회가 어떻게 지탱되어갈지 암담한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여전한 빗소리와 함께 날이 밝았다. 동네 할머니가 볶아주신 돼지감자를 정성스레 달였다. 몇해 만인가에 맞는 따듯한 입동을 지나, 비가 그치는 오후부터 추워진다는 날씨예보가 있어서, 따뜻하게 마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주리라고, 있는 보온병을 모조리 꺼냈다. 홍명희 생가인 홍범식 고택 마당에는 만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한쪽에서 길놀이를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참석자 이름을 적는 천막 아래 들어서니, 동학운동 당시 전봉준이 돌렸던 연통문 서명판이 펼쳐져 있었다. 이름을 적는 마음이 사르르 떨렸다. 마침 아는 분이 계셔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옆 테이블에서는 손펼침막을 적도록 했다. 우리나라의 미래, 농업이 답이다. 함께 외쳤던 구호다. 마침 하늘이 밝아졌다. 부슬거리던 빗방울도 내리기를 멈추어서 얼마나 다행이던지. 쓸데없는 노파심으로 새벽잠을 설친 게 우스웠다. 행사 진행자의 마이크가 직직거리긴 했어도 순조롭게 이어졌다. 홍명희의 삼일운동에 대한 설명도 진행되었다. 그동안 마당은 모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아는 얼굴들이 많이 없어서 서운하긴 했지만 어쩌겠니, 돈 버는 일이 우선인 지금 세상이니 말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농촌이 조금 여유로워지는 이즈음이다. 그러나 괴산은 절임배추 작업이 한창인 시기란다. 너의 친구들이 직장에 매여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만큼 이곳의 농부들도 돈 되는 일 앞에서 단 세시간도 양보할 여유들이 없구나. 어깨 겯고 여럿이 함께하는 일이 새삼, 너무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펼침막을 펼쳐 들고 만장을 앞장세워 행진을 시작했다. 앞에서 길놀이패가 흥을 돋우었다. 긴 행렬은 도로를 메웠고 선글라스의 교통경찰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차량통행을 위한 수신호를 보냈다. 선두에 선 차량에서 무어라고 계속 말을 하는데 도통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조금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이제 생각하니 추진자에게 의견을 말해줄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도착한 기술센터에서는 미리 와 있는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드디어 민회를 시작했다. 농촌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의제를 놓고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는 자리였다. 추진하는 단체마다 미리 준비한 의견들이 있었다. 농촌의 주민자치에 대한 의견이 대두되었다. 괴산군에 800여개의 단체가 있다는 것에 놀라고, 의사결정 위원회에 농민은 15%에 불과하다는 통계에 또 놀랐다. 농업군에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농민이 15%라니, 그럼 농민을 제외하고 누가 결정한다는 말인가. 사회를 맡은 진행자의 앞에서부터 자리를 채워달라는 몇번의 안내에 충실히 따라 앞에 앉았다. 덕분에 뒷자리에 담당 공무원이 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자리처럼 직접 민심을 듣는 자리가 흔치 않은 만큼 담당 공무원이 꼭 들어야 하는데도 참석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하긴 담당 공무원이 와 있었다고 의사 전달이 제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다.

이어서 청년 문제도 제기되었다. 기본 생활 보장과 함께 꼭 농업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어도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의견을 듣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나 박진도 교수도 거들었다. 가는 곳마다 제기되는 의견이라고 했다. 의견이 많으면 해결책도 많아질까 의구심도 들었다. 청년 문제도, 농촌 문제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만 공유되는 모양이다.

의견이 모아지면 피드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인 의미가 있고 다시 모일 수 있고, 그래야 희망이 생긴다. 소중한 자리였고 자리를 만들고 추진한 모든 분께 감사했다. 우리는 때때로 잊고 산다. 뭣이 중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그렇게 놓친다.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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