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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화내는 일에 지치지 않기

등록 2022-05-11 15:46수정 2022-05-12 02:36

지난 3일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 청사 앞 시위에서 한 시민이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사건 판례의 폐기에 찬성한 대법관 5명의 얼굴 사진이 들어간 팻말을 들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지난 3일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 청사 앞 시위에서 한 시민이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사건 판례의 폐기에 찬성한 대법관 5명의 얼굴 사진이 들어간 팻말을 들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숨&결] 강도희·최연진|대학원 박사 과정(국문학)

지난주 미국 연방 차원에서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보장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기로 한 연방대법원의 다수 의견서가 유출됐다. 아직 공식적으로 판결이 난 것은 아니지만, 대법관 9명 가운데 최소 5명이 ‘로 대 웨이드’ 판결 무효화 쪽에 선 사실이 확인된 만큼, 판례 변경은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당연히 미국 전역의 여성들이 거리에서, 웹상에서 격한 반발을 쏟아냈다. 유명 여성 인사들이 너나없이 낙태 경험을 고백하며 분노에 동참하고 있는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여성 정치인이 한명 있다.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이다.

소셜에서 수없이 공유된 영상에서 “나는 화가 났다”(I am angry)는 말로 말문을 연 워런 의원은 “미국인의 대다수가 원하지 않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연방대법원에서 자신들이 다수를 차지할 수 있도록 주의 깊게 대법관들을 골라 가며 음모를 꾸며왔다”며 보수 절대우위 구조(보수 6명-진보 3명)로 연방대법원을 개편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집권 당시 공화당 세력을 맹비난했다. 이러한 ‘꼼수’로 연방대법원에서 보수 의견이 과대대표된 것과 달리, 최근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 69%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워런 역시 이 점을 환기하며 “보수지역과 진보지역, 젊은 사람과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미국 전역에 걸쳐, 미국 전역의 사람들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이 땅에 유지되기를 바란다”고 역설했다.

말보다 인상적인 건 그의 생생한 분노의 감정이다. 현장 리포터도 “이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와 숨소리를 통해 미국 여성들이 느끼는 모욕감과 격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고 생각하다가 멈칫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9년 4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3년간 입법 공백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연방대법원 판결 뒤엔 주별로 운명이 갈리게 될 미국 여성들처럼, 나 또한 후속 입법 내용에 따라 24주 내 자유로운 임신중지를 보장받지 못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그러고 보니 진보와 보수, 젊고 늙음을 가리지 않고 국민 대다수가 이 땅에 존재하길 바라는 법이 한국에도 하나 있다. 지난주 공개된 여론조사기관 갤럽 조사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57%로 반대 응답(29%)보다 두배가량 많았다. 지역, 성별, 연령, 지지 정당, 직업, 정치 성향 등 어떤 기준으로 나눠 분석해도 제정 반대가 찬성보다 많은 경우는 단 한개도 없다. 지지 정당이 더불어민주당인 경우 ‘절대다수’라 할 수 있는 71%가 제정에 찬성한다고 응답했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을 당론으로 채택하지 않은 지도부에 격한 분노를 쏟아내는 의원을 찾아보기는 어려우니 이 또한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도시에서의 생활을 ‘충격체험’으로 규정한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반복을 통해 충격의 효과를 둔화시킴으로써만 감각의 과부하 없이 도시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고 봤다. 베냐민에게 충격의 반복 훈련을 위한 매체가 영화였다면, 현대인에게는 충격적인, 충격이어야 마땅할 사건 소식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소셜 피드가 그 구실을 한다. 갈수록 감각이 무뎌지는 것은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고 혐오의 시대를 살아내기 위한 본능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권리를 박탈당하고 배제되는 일이 너무 빈번해서, 없는 채 살아가는 일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에 무감해져서는 안 될 일이다.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여성 혐오로 점철된 대선을 지나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대한 노골적 비난에 이르기까지 혐오정치의 행보를 지속해온 국민의힘이 여당이 됐다. 필시 앞으로 5년도 지겹도록 반복되는 충격의 연속이리라. 그럼에도 “나는 화가 났다”는 분노에 찬 외침을 되새기며 생각한다. 분노를 양분으로 우리의 투쟁 역시 이어질 것이다. 무감해지지 않고, 결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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