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프’(F). 대학에선 학사경고를 받는 괴로운 학점이지만, 영화계에선 다양성 향상에 일조했다는 ‘상찬’에 가까운 의미다. ‘에프등급’은 2014년 영국 배스영화제에서 처음 도입된 분류 기준으로, 제작 과정에 ‘여성’이 영향을 끼친 정도를 평가하는 등급이다. ‘에프’는 여성(Female)의 앞글자다.
에프등급의 조건은 ①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 ② 여성 작가가 각본을 쓴 작품 ③ 여성 캐릭터가 주요 역할을 맡은 작품이다. 한 가지라도 충족하면 에프등급, 세 가지 모두를 충족하면 ‘트리플 에프등급’이 부여된다. 미국 최대 영화 리뷰 사이트 ‘아이엠디비’는 2017년부터 채택했는데, 현재 등록 영화 중 에프등급은 모두 2만5862편이고, 이 중 트리플 에프등급은 1552편이다.
비슷한 평가 방법으로 ‘벡델 테스트’도 있다. 미국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제안한 방법인데, 두명 이상의 여성이 등장해야 하고, 그 두명이 대화를 해야 하고, 그 대화는 남자에 대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붙는다. 벡델 테스트에 견줘 에프등급이 여성의 주체적 역할을 더 잘 판가름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한국 영화 상당수는 벡델 테스트조차 통과하지 못한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의 ‘2021년 한국 영화산업 성인지 통계’를 보면, 흥행 30위 작품 중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39.3%에 불과했다. 이는 같은 기간 순제작비 30억원 이상 상업영화(17편) 중 여성 감독은 2명(11.1%), 여성 주연은 3명(17.6%), 여성 촬영감독은 1명(6.3%)에 불과한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최근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여성가족부 성평등 문화 추진단 사업을 두고 “어떤 사업은 한국 영화에 성평등 지수를 매기는데, 여성 감독·작가·캐릭터가 많이 나오면 지수가 높다고 한다. 이런 사업을 왜 세금으로 지원하느냐”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지난 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영화 지원사업에서 여성이 참여한 작품에 가산점을 주는 영진위의 ‘성평등 지수’ 제도에 대해 “여성 영화인의 구조적 차별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라며 차별이 아니라고 결정한 바 있다. 이는 스웨덴·영국 등 선진국에선 벌써 시행 중인 제도이기도 하다. 집권 여당 원내대표의 성평등 인식 수준이 에프등급은 못 받을지언정 에프학점짜리여서야 되겠나 싶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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