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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영희 칼럼]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아 미안하다

등록 2022-08-29 15:42수정 2022-09-06 10:48

집권여당의 연찬회에 ‘여성 4인방’ 이야기가 농담처럼 나오는 동안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핀란드의 37살 산나 마린 총리의 최근 스캔들은 상징적이다. 과거 여성 지도자들의 ‘엄마 리더십’과 전혀 다른 리더십을 가진 젊은 여성 지도자의 등장은 논란을 한층 첨예화하며 격렬한 세대간·젠더간 충돌을 낳고 있다.
핀란드의 산나 마린 총리가 지난 25일 자신이 소속한 사민당 모임에서 발언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핀란드의 산나 마린 총리가 지난 25일 자신이 소속한 사민당 모임에서 발언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김영희 | 논설위원실장

차유람 국민의힘 특보의 남편인 이지성 작가가 지난주 당 연찬회에서 했던 ‘여성 4인방’ 발언은 언급된 정치인들의 반발과 본인의 사과, 막장극 같은 당의 ‘비대위 시즌 2’ 논란에 어영부영 묻혀가고 있다. 이씨는 ‘할아버지’ 당 이미지를 불식하려면 젊음과 아름다움이 필요하다며, 배현진·나경원씨나 김건희 여사로는 좀 부족하니 아내가 입당해 ‘4인방’으로 끝장내라고 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매력은 정치적 재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문제는 공정해야 할 정치의 영역에서도 그 매력이 종종 여성이나 청년 정치인에겐 다르게 요구되는 구조일 것이다. 그런데 주호영 전 비대위원장은 이 발언이 “오해할 만하고 적절하지 않은 부분도 없지 않은 것 같아서 유감“이라면서도 박수와 환호가 나온 자신들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전체 맥락을 봐야지”라는 김기현 의원 반응도 보도됐다. 아무리 전체 맥락을 살펴봐도, 떠오르는 건 젊음과 여성이 당 이미지를 위한 구색 정도의 ‘토큰’에 머무는 한국 정치 민낯뿐인데 말이다.

사실 여성이 토큰의 지위를 넘어선 서구 정치도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여성은 외모나 스타일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논란이 된다. ‘무티’(엄마)라 불리며 국민적 지지를 받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전 총리 역시 오랜 세월 패션과 헤어스타일, 생각에 빠져 종종 짓는 찌푸린 표정으로 언론의 맹공을 받았다. 논리와 정책으로 국민들을 설득할 자신이 있던 메르켈이지만 결국 고집을 꺾고 스타일 전문가들 손길을 받아들였다.

벨기에 출신의 여성 언론인 크리스틴 오크렌트는 여성 지도자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2007년 쓴 책에서 “남성 정치인은 권위 있다 할 때 여성에겐 권위적이라 한다. 남성에게 매력 있다 할 때 여성에겐 꼬리 친다 한다. 남성에겐 상대방을 사로잡는다고 하면서 여성에겐 환심을 사려고 한다고 한다. 눈가가 거무죽죽해질 정도로 피곤한 남자는 정력을 다 바쳐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지만 얼굴에 피로의 기색이 역력한 여자는 볼썽사나운 얼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진다. 과거 여성 지도자들이 ‘엄마 리더십’으로 두루뭉술 넘어가거나 견뎌냈다면, 이런 리더십을 거부하는 젊은 여성 지도자 등장은 한층 논란을 첨예화하며 격렬한 세대간·젠더간 갈등을 낳고 있다. 최근 한국 언론에 ‘광란의 파티’ 같은 자극적 제목으로 소개된 37살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의 영상 유출 스캔들은 상징적이다.

마린 총리가 가수·방송인 등과 ‘저세상 텐션’으로 춤을 추며 파티를 벌이는 모습과 총리 관저에서 두 여성 인플루언서가 상의를 거의 벗은 채 찍은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유출되자, 국가 지도자의 적절한 처신과 정치인의 사생활 영역이 어디까지인가를 두고 논란이 뜨거워졌다. 기준은 사람마다 사회마다 다를 수 있다. 인상적인 건 구차한 변명을 않은 마린 총리의 대응이다.

그는 “나는 여가 시간에 친구들과 춤추고 노래하는 합법적인 일을 했다”고 당당해하면서도 신속하게 자진해 마약 검사를 받고 관저 사진엔 깨끗이 사과했다. “암운 속 때론 즐거움과 기쁨이 필요한” 인간임을 호소하면서도 ‘교훈을 배웠다’고 자신을 돌아봤다. 스캔들이 나면 거짓말과 변명이 앞서기 마련인 기성 정치인들과 다른 모습이다.

지난 25일 충남 천안시 재능교육연수원에서 열린 국민의힘 연찬회 모습. 연합뉴스
지난 25일 충남 천안시 재능교육연수원에서 열린 국민의힘 연찬회 모습. 연합뉴스

소셜미디어엔 ‘산나와의 연대’ 해시태그를 달고 춤추는 여성들의 영상이 번졌다. 춤추는 총리 사진을 문신으로 새긴 젊은 남성도 화제가 됐다. 이들에겐 ‘일도 열심, 노는 것도 열심’인 그가 롤모델이며, 극우파 게시판이 별 근거 없이 제기한 마약 의혹이 기성 언론에 순식간에 번지거나, 4살 딸을 둔 그의 ‘엄마 자격’을 운운하는 평가가 나오는 게 ‘젊은 여성’ 정치인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남성이었더라도 사퇴 요구가 나올 법한 사안은 맞지만, 비난의 내용이 다르고 논란의 강도가 더 커진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여성 커플 집안에서 자라나 20대엔 백화점 계산 일을 했고 2019년 세계 최연소 선출직 국가 지도자가 된 마린 총리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정치인이다. 그동안도 여러차례 “30대 여성으로서 내 삶을 바꾸진 않겠다”고 밝혀왔다. 성공적인 코로나19 대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력히 규탄하며 핀란드를 나토 가입으로 이끈 카리스마는 든든한 그의 정치적 자산이다. 반면 내년 총선을 앞둔 정치 상황에서 록 페스티벌과 파티 마니아이자 에스엔에스를 광적으로 이용하는 그가 언제든 비슷한 리스크의 덫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도 적잖다.

마린 총리의 정치적 미래와 별개로 이번 논란은 여성이 정치 권력의 다수를 점하는 게 현실화되며 나타나는 진통일지 모른다. 성평등 수준이 높은 핀란드에서조차 연정 소속 5개 당 중 4개 당대표가 40살 미만 여성이고 내각 중 여성이 훨씬 많은 상황은 이례적이다. 타르야 할로넨 전 핀란드 대통령은 이것이 “어떤 남성들에겐 상처가 됐을 것”이라며 “그들은 모든 연령대의 여성이 정치적 지위를 차지하고 다스리는 게 예외가 아니라 노멀이 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고 <뉴욕 타임스>에 말했다. 한국 정치와는 거리가 너무 먼 이야기라 할 것이다. 하지만 ‘산나와의 연대’처럼 이 ‘구조적 차별’을 느끼기 시작한 이들이 나타나는 걸 막을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든 갈라치기를 하든.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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