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 편집인
지난달 27일 오전 회의 중 배우 이선균씨의 뉴스 속보가 떴다. 순간 진심으로 오보이길 바랐다. 좀 더 뻔뻔한 사람이었으면 달랐을까. 지난 두달여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요란한 수사와 보도를 어떻게든 버텨내려던 포토라인 앞 그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슬픔과 안타까움, 뭔지 모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든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11월24일 방송됐던 ‘케이비에스(KBS) 뉴스9’를 유튜브에서 뒤늦게 찾아봤다. 케이비에스는 이씨의 혐의와 전혀 무관한, 유흥업소 실장과 나눈 사적인 통화 내역과 함께 경찰에서 그 실장이 했다는 진술을 각각 ‘단독’ 보도로 상세히 전했더랬다. 앵커와 취재기자의 스튜디오 대화도 덧붙였다. 그가 떠난 뒤 당시 보도 영상과 케이비에스의 모든 이씨 관련 뉴스 영상의 유튜브 댓글창은 닫혔지만, 영상은 계속 돌아간다. 7분여 분량인 당시 뉴스를 반복해 붙여 12시간 가까이로 만든 버전도 있다. 굳이 이런 반복편집 영상까지 추가 제작하고 계속 재생되도록 해야 하나.
이씨가 생을 마감하기 전날 밤, 그와 유흥업소 실장의 더 많은 통화 녹취를 올렸던 것은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다. 사건 당일엔 커뮤니티 글을 통해 고인의 명복을 빈다면서도 가세연 방송이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며칠 뒤 영상에선 이씨 의혹을 제기해온 자신과 같은 유튜브 채널들이야말로 올드미디어에 맞선 진정한 뉴미디어이고, 일부 외신의 이씨 사망 보도에 윤석열 정부의 마약 수사가 언급된 건 한국지사에 있는 ‘좌파 한국인들’ 탓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도 하고 있었다.
수사기관의 성과내기를 위한 망신주기식 수사나 피의사실 흘리기와 함께 유튜브의 선정성, 사회적 책임을 잊은 언론의 조회수 경쟁이 이씨 사망 뒤에 자리잡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전통매체의 개별적인 영향력은 쪼그라들었지만, 화제가 되는 이슈마다 경쟁적으로 기사를 쏟아내며 덩어리로 여론을 형성하는 기능은 포털과 유튜브의 시대에 더 강력해졌다. 슬로우뉴스 및 경향신문에 따르면, 언론진흥재단 카인즈에서 10월19일부터 12월26일까지 ‘이선균’ ‘마약’ 키워드 보도는 54개사 2820건에 달했다. 네이버 뉴스로 넓히면 1만418건이다. 한겨레가 적게 썼다는 사실만으로 자괴감이 사라질 순 없다. 게다가 이씨의 녹취 보도는 공영방송과 극우 유튜브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보여줬다.
언론사들의 자율규제 기구인 한국신문윤리위원회의 윤리위원으로 참여하며 요즘 언론의 민낯을 새삼 들여다본다. 한달에 수백건씩 윤리강령과 실천요강, 자살보도준칙 등에 어긋난 기사·광고를 심의하는데, 반복되는 매체들이 늘 있다. 그나마 윤리강령 준수를 서약한 268개 회원사는 자율규제와 언론중재법 대상이기라도 하지, ‘유사 언론’ 노릇을 하는 유튜브 채널은 그조차도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직접 플랫폼이나 유튜브 콘텐츠를 규제하거나 검열하라 할 것인가. 그건 이미 ‘가짜뉴스’ 척결을 구실로 위태로워진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벼랑으로 미는 길이 될 뿐이다.
이씨가 떠난 날 작사가 김이나씨가 에스엔에스에 올린 글의 울림이 내겐 컸다. 그는 이씨의 사생활 이슈화나 마약 수사가 과하다고 느끼면서도 가십 소비 정도로 여겨왔던 자신의 모습을 고백했다. “차라리 악플러거나 아예 그런 기사에 관심을 끄는 사람이 아닌, 그 가운데 어디쯤 있는 어쩜 제일 비겁한 부류에 있는 게 나네… 어떻게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원인을 대중에게 돌린다는 일부 네티즌들의 비난에 그 글은 몇시간 만에 지워졌다.
김씨의 글이 대중을 비난한 것이란 지적도, ‘나도 비겁했다’는 생각이 구조적 문제를 가린다는 식의 사고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는 법·제도의 정비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지금 피의사실 공표 금지나 포토라인 가이드라인, 언론중재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김씨 글에 공감한 이유는, 이 비극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되고픈, 그런 사회에서 살고픈 대중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침묵해선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구글 같은 플랫폼에 혐오와 인권침해를 일삼는 채널들의 폐쇄 요구 등 강력한 압력을 만들어내고, ‘사회적 관심이 큰 사안’이란 말 뒤에 숨어 공인의 범위와 인권에 대한 질문을 게을리하는 언론을 도태시킬 수 있는 존재 역시 그런 대중이다.
한 지인의 페이스북 글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뭐 내가 잘 아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나설 것 있나? 그렇게 죽음이 우리 곁에 내려온다. 실제로 죽지 않았다고 죽음이 오지 않은 것도 아니다. 분노와 환멸, 차가운 냉기, 손잡기를 포기하는 마음이 죽음이다. 누군가는 빨리 떠나고, 누군가는 서서히 죽어가지만 어느 쪽이든 살아 있는 모습은 아니다.” 이선균씨와 유족들의 평안함을 빈다.
편집인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