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조사단을 이끌고 지난 1일 자포리아 원전을 방문했던 라파엘 그로시 사무총장이 자포리아시 외곽에서 2일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자포리아/AFP 연합뉴스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전쟁이 벌어지면, 진실은 사라지고 오직 이기려는 선전선동만이 판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자포리자 원전을 사이에 둔 포격 등 교전 상황이 전형적이다.
핵 재앙 우려가 국제사회에 만연하나, 기껏해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쪽이 포격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정도만 전해진다. 러시아는 자국군이 점령하고 주둔한 자포리자 원전을 향해 포격을 가한다는 것인가? 우크라이나가 자국 주민이 가장 피해를 볼 자포리자 원전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가?
지난달 29일 미국 국방부의 언론 브리핑에서 익명을 요구한 ‘고위 군 관리’는 이 사태에 대해 “우크라이나가 그 인근에 포격을 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며 “그들이 했을 가능성이 아마 있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위치에서 포격하는 러시아에 대한 대응 포격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러시아가 자포리자 원전 시설을 볼모로 하고는 그 위치에서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기존의 서방 주장의 연장이나, 우크라이나도 원전에 포격을 가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지난 7월22일 우크라이나 국방부의 국방정보국은 트위터에 자포리자 원전에 주둔한 러시아군 텐트가 드론으로 공격당하는 동영상을 올렸다. 텐트 옆에서 폭발이 일어나 불타고, 러시아 병사들이 혼비백산 도망치는 장면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자살 드론 공격으로 러시아 병사 3명이 죽고, 12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핵 문제를 감시하는 ‘우려하는 과학자들의 연맹’의 핵발전소안전국장인 에드윈 라이먼은 미국 공영방송 <엔피아르>(NPR)에 우크라이나가 자신의 공격 정밀성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며 “불장난이 명백히 시작됐다”고 우려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황을 매일 언론에 제공하는 미국 ‘전쟁연구소’는 자포리자 원전을 둘러싼 핵 재앙 긴장은 미국이 이번 여름 들어서 우크라이나에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하이마스)과 공격용 드론 등 정밀 중무기를 제공하는 시점과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이 무기들을 가지고 헤르손 등 남부 지역 탈환에 나서는 반격을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가 자포리자 원전을 건드린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안고 있는 모순과 기만을 보여준다.
유럽 최대인 자포리자 원전은 우크라이나 전력의 20%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동맹국인 벨라루스 등 옛 소련 공화국 국가들에 전력을 공급했다.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전쟁이 발발하자 벨라루스 등으로 가는 원전 전력을 끊고는 이를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돌리겠다고 밝혔다. 침공한 러시아가 3월에 자포리자 원전을 점령했는데, 그 운영은 여전히 우크라이나 회사와 기술진이 했다. 전력망 배분도 그대로 유지됐다.
하지만 7월에 우크라이나는 원전 전력을 루마니아를 거쳐서 유럽연합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를 유럽 동맹국들이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는 과정의 시작이라고 말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러시아군이 전력망 변경을 막으려고 직원들과 충돌했는지, 직원들이 러시아군에게 구타 등 괴롭힘을 당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러시아는 아예 자포리자 원전을 우크라이나 전력망에서 완전히 끊어버리고, 자국 전력망으로 연결하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즈음을 기해 자포리자 원전을 둘러싼 포격전이 시작됐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에도 전력을 인근 국가에 팔려 했고, 러시아는 위험스럽게 원전의 전력망 교체를 시도하다가 벌어진 것이 자포리자 원전 사태라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소비하는 가스의 약 30%를 유럽으로부터 수입한다. 그런데 이 가스는 사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가스관을 통해 유럽에 수출한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유럽으로 수출하는 러시아 가스를 도중에서 받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가스관 통행료를 여전히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는 유럽 국가들에 러시아 가스 등 에너지 수입을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러시아도 독일로 가는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은 폐쇄하면서도, 정작 교전국인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가스관은 잠그지 않고 있다.
전쟁을 해도 먹고살아야 하기에, 러시아나 우크라이나가 서로 얽혀 있는 전기나 가스 문제를 놓고 기만과 위선을 떠는 것도 이해한다. 그들이 전쟁을 하기에 그 문제들을 가지고 선전선동에 이용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전쟁의 선전선동에 국제사회 전체가 진영논리로 갈라지고 있다. 핵 재앙을 부르는 사태이고, 3차대전으로 비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자신 있게 장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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