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군 풍양면 대청유자마을에서 올해 11월 딴 유자. 왼쪽부터 상품(지름 9㎝), 중품(지름 7㎝)으로 분류되고 오른쪽 지름 5㎝짜리 유자는 상품가치가 거의 없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전국 프리즘] 김용희 | 전국부 기자
“이게 유자인가요? 탱자인가요?”
지난달 23일 가뭄 피해를 취재하러 들른 전남 고흥군 풍양면 대청유자마을에서 만난 이재용 이장에게 건넨 첫 질문이었다. 멀리서 탁구공만한 노란 열매를 보고 ‘농장 한쪽에 심은 탱자나무일 수도 있겠다’라고 섣부르게 생각했다. 나무에 가시가 없는 걸 보곤 아차 싶었다. 다행히 이 이장은 “이 시기에 이렇게 자잘한 열매는 나도 처음 본다”며 이해해줬다. 유자가 한창 몸집을 불려야 하는 10월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란다. 그는 텅 빈 농장 중간 땅을 보여줬다. 5년 전까지는 유자나무로 채워졌지만 2018년과 작년 겨울에 영하 10도까지 떨어지는 한파가 덮쳐 나무들이 얼어 죽었단다. 한반도 남쪽 땅 고흥은 겨울에도 여간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곳이다.
올해는 총강수량이 적어서 피해가 생겼지만 가을 가뭄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벼는 9∼10월 강한 햇빛 속에서 수분을 말려야 낟알이 꽉 찬다. 2년 전 쌀 농민들은 수해 때문에 울상 지었다. 2020년 6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50여일간 지속된 역대 최장 장마에 이어 8월22일 바비, 28일 마이삭, 9월1일 하이선 등 태풍 3개가 잇따라 북상해 곡식이 여물 틈을 주지 않았다. 당시 우리나라 쌀 생산량은 350만6578t, 올해는 376만3700t이다.
재작년 4월 초에는 때늦은 한파가 닥쳐 나주 배 농가가 큰 피해를 봤다. 배꽃 만개 시기에 사흘간 최저기온 영하 4도의 추위가 닥쳤다. 꽃과 잎이 검은색으로 변하며 떨어져 배나무가 수분하지 못했다. 전남 배 재배면적 2143㏊ 중 1319㏊가 저온 피해를 받았다. 2019년 5만582t이었던 전남 배 생산량은 2만7788t으로 45% 줄었다.
이상기후는 식물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다. 2014년 여름 해남군 농작물을 습격한 수십억마리 풀무치는 6∼7월 마른장마가 이어지다 8월 초 한차례 하루 100㎜가 넘게 쏟아진 폭우가 원인으로 꼽혔다. 올봄 60억마리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 꿀벌 실종 사건의 배경도 평년보다 따뜻한 2월 겨울잠에서 일찍 깬 꿀벌이 해 질 녘 갑자기 떨어진 기온에 적응하지 못한 탓으로 추정된다.
2019년 9월∼2020년 2월 지구온난화에 따른 오랜 가뭄 속에서 전체 숲의 14%를 태운 오스트레일리아 산불처럼 극단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곳곳에서 이상기후 피해가 일어나고 있다.
올해는 유독 전남지역 가뭄이 심하다. 역대 최저 강수량(1월1일∼12월11일 829㎜)에 11호 태풍 ‘힌남노’는 경남으로, 12호 태풍 ‘무이파’는 서해 반대편 중국 쪽으로 북상해 저수지에 물을 채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13일 기준 전남 농업용 저수지 저수율은 45.6%다. 계속 비가 내리지 않는 상황에서 물 소비량이 줄지 않으면 광주시는 내년 3월 30년 만에 제한급수를 하겠다고 경고했다. 완도 등 섬 지역은 이미 11월 초부터 제한급수에 들어갔다.
말라가는 밭작물을 바라보는 농민들 속도 타고 있다. 사람 마실 물도 부족하다는데 마냥 지하수를 퍼 올려 밭에 뿌릴 수 없는 노릇이다. 생산량이 줄면 가격이 올라야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올 고흥 유자 수확량은 작년보다 20% 줄 것으로 예상하지만 코로나19로 수출길이 막혀 상품 기준 1㎏당 최저가격이 지난해 2900원에서 올해 2500원으로 떨어졌다. 다른 농수축산물도 비슷하다.
농민들은 하늘만 바라볼 수 없다고 말한다. 풍작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저 매년 일정량을 수확해 적정 가격을 받고 싶다고 했다. 더위와 추위는 막을 수 없어도 가뭄은 미리 대비할 수 있다고 했다. 김병덕 전국양파생산자협회 사무총장은 “바다로 빠져나가는 물을 가둘 수 있는 저류지만 있었어도 섬 지역 상황은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했다. 12월∼내년 2월 장기 기상예보를 보면 남부 가뭄은 완화될 전망이지만 이상저온과 이상고온 발생 확률이 높아 또 다른 피해가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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