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법무부·공정거래위원회·법제처 새해 업무보고에 한동훈 법무부 장관,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 이원석 검찰총장 등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아침햇발] 박현 | 논설위원
10년 전 타계한 헬렌 토머스 미국 통신 기자는 ‘백악관 기자실의 전설’로 불린다. 1960년부터 2010년까지 50년간 백악관을 출입하며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10명의 대통령을 취재했다. 그는 30년간 백악관 브리핑실의 상석인 첫째줄 중앙에 앉아 날카롭고 공격적인 질문으로 역대 대통령들을 불편하게 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쓴 책 <백악관의 첫째 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첫 질문을 하고자 일어설 때면 몸으로 이런 것을 느꼈다. 카터 대통령은 ‘움찔’, 레이건 대통령은 ‘웅크리기’,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오 노!’라고 말하는 걸.”
그는 기자들은 권력자에게는 무례해도 용서가 된다고 자주 말했다. 대통령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게 기자의 특권인 동시에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는 1996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기자들)는 이 사회에서 대통령에게 정기적으로 질문을 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왕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견제받지 않는 대통령은 왕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경고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의 타계 소식을 듣고 낸 애도 성명에서 “헬렌은 나를 포함해 대통령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한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 얘기를 길게 소개한 이유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요즘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언론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으려 하고, 견제를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다. 야당에 대해선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취임한 지 9개월째가 됐건만 제1야당의 대표는 물론이고 원내 지도부조차 만나지 않고 있다.
이런 대통령은 지금껏 처음 겪는다. 역대 대통령들은 해외 순방을 다녀온 뒤에는 여야 대표를 초청해 순방 결과를 설명하는 게 관행이었다.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더라도 그렇게 만난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민생과 시국 현안을 논의하곤 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번 순방 뒤에도 여당 지도부만 관저에 초대했다. 야당 대표가 ‘피의자’이니 안 만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수사와 정치는 엄연히 별개이고, 별개여야 한다. 대통령이 제1야당을 만나지 않는 것 자체가 수사와 정치를 ‘한몸’처럼 여긴다는 방증일 수 있다. 상대 당을 인정하는 건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중의 기본인데 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날로 불어나는 대출이자와 치솟는 난방비 등으로 도탄에 빠진 서민층을 구하려면 국회 다수당과 협치가 필수적인데도 아예 상대도 않겠다니 황당하다. 윤 대통령은 언론과도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거리두기를 이어가고 있다. 통상 전 언론을 대상으로 하는 신년 인터뷰조차도 한 언론사하고만 하고는 그걸로 끝이다. 기자들로부터 불편한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아서일 게다. 지금 우리나라는 영락없이 ‘정치 후진국’으로 전락한 모습이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견제와 균형’이다. 입법·행정·사법부의 3권 분립과 제4부로서 언론의 감시 기능, 여기에다 행정부 내에서도 견제 장치가 작동해야 민주주의가 구현된다. 어느 한사람이 독주를 하면 탈이 나게 돼 있다. 국정 운영이나 정치적 경험이 거의 없는 경우라면 그럴 개연성은 더 높아진다.
윤 대통령은 새해 들어서도 ‘아랍에미리트(UAE)의 적은 이란’이라고 실언을 해 불필요한 외교적 논란을 초래했다. 또 북한의 공격에 대해 ‘100배, 1000배 보복’ 전략을 주문해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반도체기업 세액공제 확대안은 정부안을 토대로 여야 합의로 연말에 국회를 가까스로 통과했지만, 대통령 한마디에 기획재정부는 말을 바꿔 지원액을 더 늘리겠다고 한다. 빠듯한 재정 여건 속에서 고금리와 난방비 급등 부담이 커진 서민층 지원 등 재원을 긴급히 더 투입해야 할 일들은 많아지고 있는데 재벌을 지원하는 데만 인색함이 없어 보인다.
과연 대통령실 참모나 내각 관료 중에 대통령의 잘못된 발언이나 판단에 ‘노’(No)라고 용감하게 말하는 이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현대 정당정치에서는 대통령이 실정을 할 때는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이 중심이 되어 견제하고 교정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당대표 선출 과정을 보면 그런 기대는 아예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나경원 파동’은 정당민주주의를 대통령이 여당 대표를 지명했던 20년 전으로 후퇴시켰다.
<역사의 종언> 저자로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저서 <정치질서와 정치부패>에서 민주적인 정치 체제를 판단하는 잣대로 국가, 법의 지배, 민주적 책임성 세가지를 들었다. 그는 국가를 통치자가 가족·친구 등 사적 인연을 통해 다스리고 강력한 엘리트 계층에 포획되는 가산제적 국가와 정부 요직에 재능과 역할 위주로 인재를 선발·기용해 국정을 운영하는 선진적 국가로 구분했다. 법의 지배는 다른 모든 시민에게 법을 평등하게 적용해도 최고 권력자에게 적용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봤다. 민주적 책임성은 정부가 특정 이해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익에 복무하도록 요구하는 체계를 말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의회가 한다고 했다. 그는 성공적인 현대 자유민주주의 정치의 경이로움은 국가가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지만 법과 의회에 의해 제한받고 합의적 방식으로 권한을 집행하는 정치질서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며, “국가가 강력한데 견제를 받지 않으면 독재가 된다”고 경고했다.
윤 대통령의 통치 방식을 이 세가지 기준으로 판단하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과 사정기관의 요직에 측근 검사들을 배치해 인사·정보·수사·감찰 등을 장악했으며,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해 여러 공공기관장에 고교 후배나 고시 준비 때 인연을 맺은 이들을 기용했다. 또한 김건희 여사의 주가조작 의혹을 뒷받침하는 녹취록 등 증거가 나왔는데도 검찰은 김 여사에 대한 소환조사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의회와 관련해선 제1야당 지도부를 대화 상대로 대하지 않고 있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백척간두 위에 서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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