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차 국정과제점검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종규ㅣ논설위원
‘노동 약자’ ‘노동시장 이중구조’라는 말이 넘쳐난다. 노동계의 오랜 화두였는데, 이번엔 ‘스피커’가 다르다. 대통령을 비롯해 ‘높으신 분’ 입에서 빈번히 오르내린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 빅데이터 분석 서비스인 ‘빅카인즈’에서 ‘노동 약자’란 문구가 포함된 기사를 찾아 봤다. 최근 석달간에만 153건이 검색됐다. 1년 전 같은 기간에는 3건에 불과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로 검색해 보니 최근 석달간 539건,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32건의 기사 목록이 떴다. 노동시장의 불평등 문제가 공론장에서 이토록 주목을 받았던 때가 또 있었나 싶다.
‘노동 약자 보호’의 선봉에 선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다. ‘노동 약자’가 포함된 최근 기사 153건 중 무려 130건에서 ‘윤석열’이라는 키워드가 함께 언급됐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기사 539건 중 ‘윤석열’이 언급된 기사도 330건이나 됐다. 대통령이 몸소 불평등 해소를 부르짖고 있으니 앞으로 가난한 노동자들의 살림살이가 좀 나아질까? 안타깝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윤 대통령의 속내가 노동 약자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보다는 노조를 흠집 내고 노동자들을 갈라치는 데 있다는 의심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다.
“노동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노-노 간 비대칭 구조다. 흔히 이중구조라고 쓰지만 정확하게는 착취구조다.”(1월11일, 역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간담회)
“국내 노조가 노동 약자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노-노 간 착취구조 타파가 시급하다”(지난해 12월26일, 대통령실 수석비서관회의)
윤 대통령의 ‘노동개혁 레퍼토리’는 한결같다. ‘기승전 노조 탓’이다. 소수의 ‘귀족노조’가 노동 약자들의 몫을 빼앗아 가고 있다고 굳게 믿는 듯하다. 앞으로 중소기업·하청 노동자들은 대기업·원청 사용자가 아니라 노조를 향해 “진짜 사장 나와라”라고 외쳐야 할 판이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노동조건 격차가 고착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대표적인 게 임금 격차다. 고용노동부 자료를 보면, 대기업(노동자 300명 이상) 정규직 임금을 100으로 놓았을 때, 대기업 비정규직은 69.1에 불과하다. 중소기업 정규직은 58.6,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45.6이다. 기업 규모와 고용 형태에 따른 격차가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지난 1일 난방비·전기요금·교통비 등 공공요금 인상 반대와 횡재세 도입, 공공성 강화 등을 요구하며 서울 동대문디지털프라자 인근에서 숭례문으로 행진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이런 격차는 왜 생긴 것일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1997년 외환위기를 노동시장 이중구조화의 변곡점으로 꼽는다. 국제통화기금의 강요로 ‘노동시장 유연화’를 받아들이면서 비정규직이 급증했다. 대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외주화를 통해 비용 부담을 하청업체에 떠넘겼다. ‘납품 단가 후려치기’와 기술 탈취 등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고질적인 불공정 거래 관행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선 중소기업에 돌아갈 몫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하청 노동자 임금이 쪼그라드는 것은 불문가지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말 펴낸 ‘2021년 기업경영 분석’ 자료를 보면, 국내 대기업이 1년간 창출한 총부가가치에서 영업잉여가 차지하는 비율은 29%로, 중소기업(10.5%)의 3배 가까이 된다. 반면 인건비 비중은 대기업(42.8%)이 중소기업(72.7%)보다 훨씬 작다. 중소기업의 임금 지불 능력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얘기다. 임금 격차의 원인을 ‘기득권 노조’의 착취가 아니라 ‘경제의 이중구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진단 아래 나와야 할 처방은 자명하다. 우선, 만연한 불공정 거래 관행, 곧 대기업(원청)의 중소기업(하청) 착취 구조를 바꿔야 한다. 흔히들 ‘경제민주화’라고 부르는 조처다. 노조 조직률을 높이려는 정책적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중소기업의 경우 유노조 기업이 무노조 기업보다 임금이 30~40%가량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국내 300명 이상 사업장의 노조 조직률은 46.3%에 이르는 반면, 100∼299명은 10.4%, 30∼99명 1.6%, 30명 미만은 0.2%에 불과하다. ‘중산층 복원’을 내세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좋은 임금의 유노조 일자리’ 창출을 천명하며 노조 조직률 제고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업 간 임금 격차를 줄이려면 초기업 단위의 교섭이 가능하도록 법과 제도를 개선할 필요도 있다. 독일·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처럼 산별교섭이 상식으로 자리잡아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할 수 있다. 노사가 정한 노동조건을 미조직 노동자에게도 적용하는 ‘단체협약 효력 확장제’를 통해 단협 적용률을 높이는 것도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특수고용노동자(특고) 등 1인 자영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고, 하청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원청 사용자와 교섭을 할 수 있도록 노동조합법상 ‘사용자’ 개념을 확장하는 일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입만 열면 ‘노동 약자 보호’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이런 얘기들은 하지 않는다. ‘노동 약자’들의 노동조건을 끌어올려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개선하려면 꼭 필요한 방안들인데도 말이다. 반면, 파견 허용 업종 확대와 도급(하청) 기준 완화, 파업시 대체근로 허용, 근로자 부분대표제 도입 등 노동조건을 후퇴시키고 노동자의 교섭력을 떨어뜨릴 정책들은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적극 추진하고 있다. 하기야 말로는 “조직화되지 못한 산업현장의 진정한 약자들을 더욱 잘 챙기겠다”고 해놓고선, 특고인 화물 노동자들의 파업에는 대기업 불공정 거래 규제기관인 공정거래위원회까지 나서 탄압하는 정부이니 말해 무엇하랴.
이러니 ‘약자 보호’는 허울일 뿐, 정부가 노리는 건 ‘반노조’ 정서 확산을 통한 노조 무력화라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정부와 재계가 의기투합한 ‘반노조 캠페인’의 궁극적 목표는 ‘기업 활동의 자유’ 극대화일 터인데, 고삐 풀린 자본의 횡포에 노동 약자의 삶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종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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