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와 김건희 여사. 연합뉴스
손원제 | 논설위원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 태산이 들썩였는데, 튀어나온 건 쥐 한마리라는 뜻이다. 중국 고사성어인가 싶어 검색해봤다. 의외로 이런 내용이 담긴 중국 고전은 찾을 수 없는 반면 그리스 이솝우화엔 딱 떨어지는 얘기가 있다는 설명이 많았다. 산이 요동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정작 나온 건 쥐 한마리였다는 에피소드다.
이걸 로마시대 시인 호라티우스가 시작법을 다룬 ‘시학’이라는 시에서 인용했다. 시를 거창하게 시작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대목에서다. “옛 시인(호메로스)처럼 ‘프리아모스의 운명과 거대한 전쟁에 대해 노래하겠다’로 시작하지 말라. 그 약속에 부합하는 뭔가를 내놓을 수 있겠나? 산이 산통을 겪고도 태어난 건 우스꽝스러운 쥐 한마리뿐.” 이 끝 문구가 누군가에 의해 ‘태산명동서일필’로 번안됐다는 설이다.
혹시나 싶어 요즘 ‘핫’한 인공지능 챗지피티에도 물어봤다. 그럴 수도 있고 고대 중국에서 따로 기원했을 수도 있다는 어중간한 답을 내놨다.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떠나 우리 사회에선 이 말이 검찰 수사를 비판할 때 쓰는 관용구로 굳어진 듯하다. 특히 현 정권 들어 사용 빈도가 부쩍 늘었다. 검찰이 온갖 명목으로 전 정권 문제를 들쑤시고 있지만 이렇다 할 결과를 내놓은 적은 드물어서일 것이다. 요번에 검찰이 야심 차게 내놓은 ‘이재명 구속영장’도 이런 궤도를 벗어나 있지 않다.
‘시정농단’ ‘아시타비’ ‘내로남불’ ‘삼척동자’(증거인멸 시도는 삼척동자도 안다)…. 이번 검찰 영장 청구서엔 법률 관련 문서에선 잘 쓰지 않는 신조어, 사자성어가 대거 동원됐다. 전체 173쪽 중 마지막 20쪽을 할애한 ‘구속을 필요로 하는 사유’ 대목은 영장이라기보다 정당 논평에 가까워 보인다. 정작 요란하게 예고했던 400억원대 개인 수뢰 혐의는 영장에서 빠졌다. 대장동 사업으로 성남시에 4895억원의 손해를 입혔다는 배임, 관내 4개 기업으로부터 성남에프시(FC) 후원금·광고비 명목으로 133억원을 받았다는 제3자 뇌물 등 기존에 거론됐던 혐의만 담았다. 둘 다 성남시와 축구단에 이익이 돌아간 정책 결정으로 볼 여지 또한 커, 법적 처벌 대상인지를 두고 논란이 큰 사안이다. 뇌물이라는 개인적 이익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배임 혐의는 동기조차 잘 설명이 안된다. 팥소 빠진 찐빵이다.
애초 검찰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자신도 뇌물을 약정받은 이익공동체의 수뇌인 것처럼 떠벌리던 것과 딴판이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16일 영장 청구에 대해 “충분한 물적, 인적 증거가 확보됐다”고 주장했다. 실은 물증을 확보하지 못해 감정적 언어로 영장을 채운 건 아닌지 궁금하다. 자고로 빈 수레가 요란하다.
야당 대표 수사에선 태산이 흔들릴 만큼 요란한 검찰이 김건희 여사 의혹 앞에선 찍소리도 못 내고 있다. 만화 <마징가제트> 속 아수라 백작의 두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그 바탕에 ‘윤심’이 자리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10일 1심 재판부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유죄 판결 이후 대통령실은 14일까지 세차례나 김 여사 관련 입장문을 냈다. 14일 입장문에선 김 여사는 ‘매수를 유도’당하거나 ‘계좌가 활용’당한 것일 뿐 주가조작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용산의 이런 노골적 사인을 못 본 척할 간 큰 검찰이 가능할까.
판결문을 보면, 과연 김 여사는 당하기만 한 걸까 의심 가는 대목이 적잖다. 재판부는 김 여사 계좌 2개가 주가조작 일당에 의해 운용됐다고 적시했다. 재판부가 유죄로 인정한 통정·가장 매매 102건 중 ‘김건희 계좌’ 거래가 48건이나 됐다. 이 거래들을 김 여사가 직접 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다면서도, 다른 공범들에게 일임됐거나 적어도 이들의 의사나 지시에 따라 운용된 계좌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이 사건 공판 검사는 당시 김 여사가 핵심 공범들의 연락을 받아 직접 거래하는 구조였음을 재판 과정에서 제시한 바 있다. 조직 침묵에 맞선 개별 검사의 소리 없는 아우성 아니었을까. 김 여사가 당한 건지, 주체적으로 가담한 건지는 이제 다른 공범들과 똑같이 강제 수사로 가려져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총장 시절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생명과도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검찰은 이제라도 야당 대표 의혹엔 증거·법리로만 말하고, 김 여사 의혹엔 빠릿빠릿 움직여야 한다. 검찰 생명 연장의 다른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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