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경남본부 조합원들이 지난 23일 기자인 것처럼 속이고 기자회견 참석자들을 촬영하던 국가정보원 수사관을 적발해, 그에게서 빼앗은 국정원 직원용 옷과 휴대전화를 공개했다. 최상원 기자
최상원 | 영남데스크
경남에 ‘어쩌다 간첩’이 자꾸 생겨나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지난해 11월9일 경남진보연합 등 경남지역 진보단체 활동가 4명의 집과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고, 이 가운데 3명을 지난 1일 구속했다. 또 지난 23일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남지역 노동조합 간부 2명의 사무실과 휴대전화 등을 추가 압수수색했다. 이른바 ‘창원간첩단’ 사건이다.
국정원은 1차 압수수색 때 제시한 영장에서, 진보단체 활동가 4명이 2017년 캄보디아에서 만난 북한 통일전선부 문화교류국 공작조의 지령을 받아 남한 내 지하조직인 ‘자통민중전위’의 핵심 조직원으로 활동한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들이 북한 지령을 받아 수행한 활동에는 ‘2018 창원 세계사격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북한 선수단을 응원한 것도 포함돼 있다.
당시 22명으로 이뤄진 북한 선수단은 8월31일~9월12일 창원에 머물며 대회에 참가했다. 창원시는 시가 운영하는 연수시설인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를 숙소로 제공하고 차량을 지원하는 등 관련 경비를 부담했다. 이들이 김해공항으로 입국할 때 창원시를 대표해 제1부시장이 공항에서 마중했고, 시장은 환영 만찬까지 열었다. 경남진보연합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 100여명은 아리랑응원단을 구성해 대회 기간 내내 북한 선수단을 응원했다. 북한 선수단 참가는 대회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국정원은 2차 압수수색 때 제시한 영장에서는 노조 간부 2명이 자통민중전위에 포섭돼 2018년부터 각각 거제와 창원에서 핵심 조직원으로 활동한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6월2일~7월22일 51일 동안 처절하게 진행된 대우조선 비정규직노조(전국금속노조 경남지부 거제·통영·고성 하청지회)의 파업투쟁도 북한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당시 노조는 경남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파업권 획득’ 확인을 받고 파업에 들어갔다. 교섭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자, 조합원 6명은 건조 중인 초대형 원유운반선 화물창의 10m 높이 난간에 올라가서 농성하고, 유최안 부지회장은 화물창 바닥에 가로·세로·높이 1m 크기 철구조물 안에 스스로를 가뒀다. 파업이 끝난 뒤 회사 쪽은 불법 파업으로 손해를 봤다며 노조 집행부 5명을 상대로 47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노동자에 대한 무분별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이른바 ‘노란봉투법’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영장에는 구속되거나 압수수색당한 6명 말고도 관련자 10여명이 비실명으로 등장한다. ‘어쩌다 간첩’이 더 늘어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어쩌다 간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기자’도 있다.
지난 23일 국정원의 2차 압수수색 때 민주노총 경남본부는 기자회견을 열어 “노동탄압의 선봉에 선 국정원을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기자회견 도중 국정원 수사관이 참석자들을 촬영하다가 적발됐다. 수상하게 여긴 민주노총 조합원이 신분 확인을 요구하자, 국정원 수사관은 ‘기자’라고 말했다. 주변에 있던 여러 기자가 이 말을 분명히 들었다. 그런데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승강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국가정보원 사법경찰관’ 신분증과 ‘국가정보원’이라고 적힌 옷이 그의 가방에서 튀어나왔다. 휴대전화에도 국정원 직원용 프로그램이 설치돼 있었다. 국정원 수사관은 뒤늦게 자신을 경찰이라고 말했다.
압수수색 때문에 격앙돼 있던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기자를 사칭해 민간인을 불법 사찰했다”며 더욱 흥분했다. 국정원 현장책임자는 “해당 직원이 당황해서 기자를 사칭한 것 같다”고 이해를 구했다. 하지만 불과 몇시간 뒤 국정원 대변인실은 공식 입장을 묻는 언론에 “‘기자라고 사칭한 사실이 없다’라는 것이 공식 입장입니다”라고 답했다. “현장에 있던 여러 기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까”라고 되묻자 국정원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경남경찰청 출입기자단은 지난 27일 국정원에 공식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cs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