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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대통령의 115분, 피해자 언급은 딱 6초

등록 2023-03-30 18:18수정 2023-03-31 02:36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1년 뒤인 2019년 10월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위한 기자회견에서 한 초등학생이 쓴 편지를 들으며 눈물을 닦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1년 뒤인 2019년 10월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위한 기자회견에서 한 초등학생이 쓴 편지를 들으며 눈물을 닦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특파원 칼럼] 김소연 | 도쿄 특파원

윤석열 정부가 지난 6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 일방적인 양보안을 발표하면서 한국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2018년 대법원에서 승소한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 3명은 일본 피고 기업 대신 한국의 재단이 돈을 내는 ‘제3자 변제’라는 정부 해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주말마다 서울시청 광장에선 정부를 규탄하는 범국민대회가 열린다.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을 기대했던 지난 16일 한-일 정상회담도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실질적인 내용이 없으니, 두 정상이 폭탄주를 마시고, 오므라이스를 먹은 것이 가장 큰 화제가 됐을 정도다.

‘결단·미래’만 강조하며 일본 퍼주기를 하는 대통령의 행보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광경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윤 대통령은 최근 4주 동안 강제동원 양보안과 관련해 공식적인 자리에서 세 차례 설명했다. 지난 15일 보도된 일본 <요미우리신문> 인터뷰 80분, 16일 한-일 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 약 12분, 21일 국무회의 머리발언 23분 등 총 115분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윤 대통령의 인터뷰를 9개 면에 걸쳐 상세히 보도했다. 인터뷰엔 ‘대법원 판결 모순’,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겠다’, ‘제3자 변제는 내가 생각한 것’ 등 믿기 힘든 발언들이 쏟아졌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대통령의 길고 긴 답변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란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일 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 때도 12분가량 이어진 윤 대통령 발언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는 없었다. 다만 21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역대 최장’ 국무회의 발언에서는 짧게 언급됐다.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분들과 유족들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이 문장을 읽는 데 딱 6초 걸렸다.

한-일 관계 핵심 쟁점인 강제동원 배상 문제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한국·일본 정부의 외면 속에 자신들의 인간적인 권리를 되찾기 위해 법정 투쟁을 벌이면서 시작됐다. 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은 1997년 일본에서 시작해 패소를 거듭한 끝에 2018년 10월 마침내 한국 대법원에서 승소한다.

대통령은 ‘모순’이라고 평가했던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일본 국제법 전문가인 아베 고키 메이지학원대학 교수(국제학)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일 관계뿐 아니라 동아시아 질서가 평화적이고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정의롭지 못한 행위, 특히 식민지 시대 발생한 문제와 마주해야 한다. 한국 대법원 판결은 인간의 존엄을 최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법률적 관점에서 보여줬다.” 그러면서 그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큰 힘을 발휘했다”고 강조했다.

20년 넘게 시간이 흐른 사이, 일본제철 소송 피해자 4명 가운데 이춘식(100) 할아버지만 생존해 있다. 대법원 판결 뒤 2019년 대한국 수출 규제 등 일본의 보복이 시작되자, 할아버지는 “나 때문에 한국에 피해가 가서는 안 되는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런 할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초등학생들이 편지를 보내 왔다. “일본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그 책임을 지는 건 가슴이 아파요. 더는 자책하지 마시고 행복하세요.”

역사 문제는 가해자인 일본이 변하지 않으면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 초등학생도 아는 그 사실을 윤 대통령만 모르나 보다.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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