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나눠먹기식의 연구비 카르텔을 없애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줄이는 정책을 발표하자 연구 현장에 혼란과 반발이 일고 있다. 위 그림은 ‘내년 국가 연구개발 예산 정책으로 내게 영향을 끼쳤거나 끼칠 것으로 예상되는 사례를 적어달라’는 설문조사 물음에 응답한 주관식 의견 글에서 응답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 30개를 모은 형태소 분석 결과를 보여준다. ESC, BRIC 제공
[오철우의 과학풍경] 오철우 | 한밭대 강사(과학기술학)
정부가 “(낡은 관행을 혁신해 연구비 나눠먹기식의) 카르텔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하며 내년 연구개발 예산 감축 계획을 발표한 이후 과학기술계가 들썩이고 있다. 내년 예산안에는 올해에 비해 10.9%(다른 계산법으론 16.6%) 줄어든 25조9000억원이 배정됐다. 연구 현장에는 혼란과 반발이 이어진다. 국제 과학저널 ‘사이언스’와 ‘네이처’도 한국 연구자 사회에 닥친 충격과 논란을 주요 뉴스로 전했다.
연구 현장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때마침 과학기술인 시민단체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와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브릭) 등이 온라인 설문조사를 벌여 그 결과를 발표했다. 브릭은 과학기술인 회원이 9만명을 웃돌 정도로 규모가 크고 활동도 활발한, 연구자들의 대표 커뮤니티다. 지난 5~9일 이뤄진 온라인 조사에는 교수, 박사후연구원, 대학원생을 비롯해 2855명이 응답했다.
설문 결과는 현장의 분위기가 정부 정책에 매우 부정적임을 보여준다. 정책 결정 방식과 절차가 합리적이고 투명하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설문에, 응답자 2.8%(78명)만 그렇다고 답했고 88.6%(2508명)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예산 삭감의 근거가 된 ‘연구비 카르텔’ 진단이 적절한지에 대한 물음에는, 5.8%(165명)가 긍정한 데 비해 85.4%(2419명)는 부정했다. 다른 설문에서는 연구비 삭감으로 장기 연구가 차질을 빚고, 고용이 불안해지고, 전공 진로에 장애가 생길 것을 우려하는 교수·연구원·대학원생·대학생의 걱정이 90% 넘는 응답 수치에 담겼다.(설문 결과 보고서는 soopsci.com 또는 ibric.org 참조)
숫자로 처리된 통계에서는 들을 수 없는 생생한 목소리도 보고서에서 읽을 수 있다. 응답자들이 남긴 짧은 의견 글이 2000건에 이르렀는데 보고서는 이를 편집하지 않고 85쪽에 걸쳐 그대로 실었다.
무엇보다 카르텔의 실체가 모호한데다 이런 진단에 대응하는 처방으로 왜 예산 삭감이 결정됐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다. “누가 카르텔인가?” “너무 일방적이고 비합리적이다.” “나눠먹기식 카르텔을 타파하겠다면 먼저 (연구비 지원) 선정 과정을 투명화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우를 범하지 않길.” 예산 삭감이 카르텔 타파보다 소규모 연구자나 박사후연구원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우려가 여러 응답에서 나왔다.
정치 논리가 과학기술 정책을 흔든다는 지적도 많다. “국가 예산 관리 실패로 생긴 문제를 연구 예산 감축으로 때우려는 건 아닌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학 정책이 바뀐다. 연구와 정치가 분리돼야 한다.” “공약대로 해주세요.”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과학과 정치의 영역 분리로 중립성 보장’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자율적인 연구환경 확립’을 주요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저마다 다른 실험실, 연구실, 개인 공간에서 나와 한데 모인 2000건의 목소리는 정부 정책이 지금 연구 현장 사람들과 발을 맞춰 나아가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