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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선거법을 바꿔야 나라가 산다 [김누리 칼럼]

등록 2023-11-22 09:00수정 2023-11-22 09:53

대학 시절 군사독재가 한국 사회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믿었다. 민주주의만 이뤄지면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이뤄진 뒤에도 좋은 나라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정권교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권교체가 된 뒤에도 기대하던 나라는 오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인가.
내년 총선에 적용할 선거제 개편안을 논의하기 위한 국회 전원위원회가 지난 4월10일 오후 국회에서 나흘 일정으로 개최돼 여야 의원들이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내년 총선에 적용할 선거제 개편안을 논의하기 위한 국회 전원위원회가 지난 4월10일 오후 국회에서 나흘 일정으로 개최돼 여야 의원들이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한국은 참 불가사의한 나라다. 세계가 감탄하는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고, 가장 불평등하며, 가장 많은 노동자가 일하다 죽는 나라가 한국이다. 여성 차별이 가장 심하고, 사회적 갈등이 가장 크며,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룬 엄청난 성취와 우리가 사는 끔찍한 현실 사이의 이 불가해한 괴리는 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나는 대학 시절 군사독재가 한국 사회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믿었다. 민주주의만 이뤄지면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이뤄진 뒤에도 좋은 나라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정권교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권교체가 된 뒤에도 기대하던 나라는 오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인가.

주지하다시피, 근대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다. 국민이 직접 모든 결정에 참여할 수 없으니 대표를 뽑아서 나의 권리를 대신 행사하도록 위임하는 것, 즉 나를 ‘대의’하도록 하는 제도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바로 이 대의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왜곡이 발생한다.

무엇보다도 대의 과정을 가장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 바로 선거제도이다. 한국의 선거제도는 단순소선거구제이다. 한 선거구에서 1등 한명만을 뽑는다.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이 60%, 당선자 득표율이 40%라고 가정할 때, 당선자는 전체 유권자의 4분의 1 정도의 표만 얻으면 당선된다. 그 결과 4분의 3에 해당하는 유권자의 의사는 대표되지 못한다. 이것이 한국에서 선거가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하는 가장 큰 이유다. 전체 의석의 6분의 1 정도를 비례대표에 배정하고 있지만, 이것이 전체 구도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다.

진보4당 및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오전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대표성과 비례성을 보장하는 선거제 개혁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진보4당 및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오전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대표성과 비례성을 보장하는 선거제 개혁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러한 승자독식, 민의 왜곡의 선거제도로 이득을 보는 집단은 거대 양당이다. 이들이 모든 지역구를 사실상 독식한다. 문제는 이러한 거대 양당 체제가 한국의 정치지형을 아주 보수적이고 퇴행적인 체제로 고착시킨다는 데 있다. 국제적인 기준으로 보면 국민의힘 계열 정당은 수구보수에 가깝고, 민주당 계열의 정당은 온건보수에 가깝다. 이들이 70년간 한국 정치를 배타적으로 지배해온 결과 우리 사회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게 되었다.

첫째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사회적 정의를 구현할 정치세력이 과소 대표되는 문제이다. 한국이 ‘사회적 지옥’이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는 새로운 시대적 어젠다를 들고나온 정당이 의회에 진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기후위기가 인류의 종말을 경고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지만 생태 문제를 제기하는 정당이 한국에서 의회에 진출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요컨대, 대한민국이 오늘날 이처럼 세계 최악의 ‘불행한 나라’가 된 것은 어디에도 유례없는 보수적인 정치지형 탓이고, 이런 기형적 정치구도는 잘못된 선거제도가 그 뿌리다. 분단국가에서 승자독식 선거제도가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정치지형을 만들었고, 이것이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를 농락하는 승자독식의 선거법을 앞세워 거대 양당은 지난 70년간 정치권력을 독점해왔다. 결국 현재 대한민국의 선거법은 바로 수구-보수 과두지배의 왜곡된 정치지형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한 방패이다.

승자독식 선거제도가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다. 민의를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한다. 시대착오적인 거대 양당에 영구 권력을 약속하고, 국민에게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강요한다. 대한민국이 이룩한 놀라운 정치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진보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잘못된 선거제도와 관련이 깊다.

최근에 또다시 거대 양당이 밀실에 모여 선거법 개악을 모의하고 있다는 흉흉한 풍문이 떠돈다. 민주당은 진정 밀실에서 수구와 야합하여 기득권을 챙기려 하는가. 진정 민주주의를 당의 정체성으로 삼는 정당이라면,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군사독재와 싸운 역사를 기억한다면, 이제 민주당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기 위해 자기희생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지금 민주당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는 선거법 개정이다. 국민의 뜻을 최대한 반영하고 사표를 최소화하는, 비례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한 ‘민의의 선거법’을 만들어야 한다. 생태, 평화, 노동, 복지 등 다양한 시대적 의제를 대표하는 정당들이 국회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터줄 ‘정의의 선거법’을 만들어야 한다. 정말이지 민주당은 더는 지지자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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