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월19일 충북 청주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 ‘생명과 지역을 살리는 필수의료혁신 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똑똑! 한국사회] 양창모 l 강원도의 왕진의사
뇌혈관질환으로 평생 침대에 누워만 있을 거라 생각했던 할머니. 물리치료사가 수개월에 걸쳐 집으로 방문한 끝에 마침내 침대에서 혼자 힘으로 일어선다. 옆에서 지켜보던 가족이 이 놀라운 기적을 기념하고 싶어 외친다. “사진 찍어! 빨리!”
얼마 전 재택의료를 위한 정책포럼에 참여했을 때 본 동영상 속 모습이다. 수년 동안 누워만 있던 사람이 앉게 되고, 앉아만 있던 사람이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는 일. 그것은 내게도 익숙한 기적이다.
관절염으로 무릎이 굳어 침대에서 못 나오던 김 할머니를 위해 방문 물리치료사를 보내 드렸다. 3개월 뒤 할머니는 유아차를 밀고 마당까지 나와 방문진료 온 우리를 마중했다. 김 할머니가 지난 2년 동안 넘지 못했던 방문턱을 단 3개월 만에 넘을 수 있었던 기적은 특별한 의사들이 특별한 환자에게 한 특별한 치료 덕분이 아니다. 보통의 의사들이, 보통의 거동불편 환자들에게, 보통의 재활치료를 해주면 일어나는 보통의 일이었다. 등산화 신고 시골길을 다닌 지난 4년 동안 그런 기적을 여러번 봐왔다.
2025년이 되면 우리나라에 김 할머니처럼 방문 재택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거동불편 환자수가 최소 35만명이 넘어간다(통계청, 2023). 이들에게 방문의료를 제공하려면 재택의료기관 몇곳이 필요할까. 현재 재택의료기관 대부분은 방문진료와 진료실 진료를 함께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특성을 고려할 때 재택의료기관 한곳당 평균 50명 환자를 관리하면 7천곳이 필요하다. 하지만 2023년 재택의료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의료기관은 전국에 28곳뿐이다. 1천명 김 할머니 중 996명은 방문진료 서비스를 받지 못한 채 방 안에 갇혀 있다는 뜻이다. 명백한 공공방임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유일한 해결책이 의사 증원이다.
내가 사는 춘천은 인구 30만에 의과대학이 두곳이다. 매년 새로운 의사 125명이 배출된다. 지방 소도시 중에 이렇게 많은 의사를 배출하는 곳도 드물다. 그런 면에서 정부의 의사 증원 계획을 미리 이루어낸 도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방문진료를 하는 병원은 단 한군데도 없다. 지난 2년 동안 침대에 갇혀 지낸 김 할머니 집을 찾아온 의사는 내가 유일했다. 지금 대통령은 ‘춘천의 전국화’를 꿈꾸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전체 의사 수를 늘리는 것보다 공공의료에서 일할 의사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 계획안에는 공공의료를 강화할 구체적인 방안이 없다. 정부 계획대로 의대 정원이 1천명씩 늘어난다 해도 할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 재택의료에 필요한 7천명 의사가 채워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공공의료에서 일할 의사를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공공의사제’다. 정부가 공공의대를 통해 별도 ‘공무원 의사’를 양성해 지역 필수의료 분야에 평생직 의사로서 일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공의료와 민간의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장벽을 세우면 굳이 의사협회의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다. 전공의들이 반대할 이유도 없다. ‘공무원 의사’는 의사 인력시장으로 들어갈 수 없어 동네 의사들의 (미래의) 경쟁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꽃이 시들시들했는데 살아나니까 너무 좋아.” 말라버린 수국꽃이 물 한번 준 뒤 살아난 걸 보고 김 할머니가 말했다. 물만 주면 사는 거였다.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하지 않아 꽃이 말라갔다.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환자를 의료진이 찾아가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하지 않아 지금도 수많은 거동불편 환자들이 집에 갇혀 한송이 꽃처럼 천장만 바라보며 시들어간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앉아만 있게 되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워만 있게 되는 이곳에서 기적은 참 슬픈 단어다. 방문 재활치료를 받은 김 할머니가 마당으로 나오게 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물만 주면 사는 것처럼.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 부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기적은 공공방임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