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칼럼
꼭 1년째 되는 ‘시사저널 사태’의 전개 과정은 경탄과 착잡함의 연속이다. <시사저널> 기자들의 무너지지 않는 꼿꼿함이 경탄의 대상이라면 동업자인 언론계의 의도적 외면은 착잡하다.
18년여 독립언론을 지켜온 시사저널이 파행 상태에 이른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1년 전 시사저널 금창태 사장은 편집국장도 모르게 인쇄소에 가서 삼성 관련 기사를 삭제했다. 이에 항의하는 편집국장의 사표는 하룻만에 수리되었고 부당성을 지적하는 기자들은 줄줄이 중징계를 받았다. 기자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금 사장은 기자 없이 시사저널을 파행으로 발행하고 있다. 이른바 짝퉁 시사저널이다. 기자들의 파업 사실을 모르고 잡지를 샀던 한 애독자는 “성추행을 당한 기분이었다”고 짝퉁 시사저널의 실상을 간단하게 정리해 준다. 얼마 전 법원은 금 사장의 기사 삭제가 정황상 편집인으로서 정당한 역할 수행이라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그런데도 짝퉁 시사저널은 매주 꼬박꼬박 발행되고 있다.
길거리나 천막에서 혹은 남의 사무실 한쪽에서 정통 시사저널의 편집권을 수호하고자 투쟁을 계속하는 기자들에게 월급 한 푼 없이 감내해야 하는 일상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은, 동종업계인 언론계의 몸사리기로 그들의 주장이 제대로 알려지지조차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사저널의 한 기자는 자신들의 파업 이유를 알릴 목적으로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해 퀴즈영웅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지난 2월 현직 기자 3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응답자 열에 아홉은 시사저널 기자들의 파업을 지지한다고 밝혔으며, 열에 여덟은 이번 사태를 ‘언론계 전반에 해당되는 문제’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대다수 언론들은 정작 이번 사태를 두고 기괴할 정도로 침묵한다. 동료가 눈앞에서 깡패들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폭행당하고 있음에도,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그래서 힘을 보태야 하는 건 알지만 어쩐지 몸이 찌뿌드드해서 고개를 돌려 버리는 식이다. 몸 따로 마음 따로다. 자본권력이 기자들의 몸과 마음에 본격적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는 한 증거다. 한 연구에, 외환위기 이후 언론인들에게서 심리적 위축 효과가 나타났고, 그에 따라 보도와 편집과정에서 기자들 스스로 자본의 영향력을 의식하게 됐으며, 신문사 경영 고민과 광고주를 의식한 자기 검열을 하게 되었단다.
그런 상황에서 지면도 없이 길거리 편집국에서 자비로 국외 취재까지 강행해 몇 건의 특종을 보도하는 시사저널 23명의 기자정신은 경탄을 자아낸다. 영웅 찬가를 부르며 그들을 미화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기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는 그들의 건강함은 현재 우리의 언론 상황에서 기자정신의 최대치를 상징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지켜 온 기자로서의 정신적 품위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져야 마땅하다. 가장 뛰어난 기자여서가 아니라 그 이름들은 자본권력과 언론에 관한 문제에서 미래의 언론 환경을 가늠할 중요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혹여 몸 따로 마음 따로인 상태에서 본의 아니게 침묵했던 언론인들이 있다면 그들 23명의 이름을 조용히 소리내어 불러보길 권한다.
고재열·고제규·김은남·남문희·노순동·문정우·백승기·소종섭·신호철·안은주·안철흥·안희태·양한모·오윤현·유옥경·윤무영·이숙이·이정현·이철현·장영희·정희상·주진우·차형석.
‘시사저널이 침묵하면 아무도 말할 수 없다’는 특유의 자긍심으로 지난 1년을 헤쳐 왔다면, 당신들 23명은 진정으로 그렇다. 공감과 격려와 존경을 보낸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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