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칼럼
경찰청이 현판 교체 문제로 여론의 눈흘김을 받고 있다. 경찰청장이 바뀔 때마다 새 청장의 지휘방침을 적은 현판을 새로 만들었는데 그 비용으로 매회 4억8천만원 가량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 세 명의 경찰청장이 현판 교체 비용으로만 15억원 가량을 사용했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획기적으로 다른 내용을 주장한 것도 아니다. ‘함께 하는 치안, 편안한 나라’라는 구호에서 ‘최상의 치안서비스를 위해’로, 다시 ‘믿음직한 경찰, 안전한 나라’라는 구호를 전파하는 데 각각 5억원 가량을 사용한 것이다. 국가 예산이 단지 기관장 한 사람의 위엄을 위해 쓰여진 세금 낭비의 대표적 사례라는 날선 비판들이 줄을 잇는다. 그에 대해 경찰청은 ‘투입비용에 비해 효과가 충분하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청장의 지휘명령이 치안일선까지 일사불란하게 전파돼야 하는 경찰조직의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또한 구호들만큼이나 관습적인 항변으로 느껴진다.
흥미로운 것은 청장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청장의 첫 사업이 현판 교체’라는 식의 비판 기사가 적지 않았음에도 현판 교체 현상이 지금까지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특정 경찰청장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경찰청이라는 일사불란한 조직이 총수의 지휘방침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기인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총수가 어떤 사람이냐에 상관없이 이미 확고하게 구축된 관습적 통로를 가진 경찰청 같은 조직에서는 언제든 생길 수 있는 문제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음달 새 청장이 취임하면 지금의 비난 여론과 상관없이 또다시 현판 교체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신임 청장이 그에 대한 문제 인식, 즉 자신이 소유하게 된 파워와 그 파워가 일사불란한 경찰 조직이라는 파이프라인을 타고 퍼져나가면서 생기는 파괴력에 대한 자의식을 갖지 않는 한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비단 경찰 총수에 국한된 문제일 수 없다. 자리가 높아질수록 자신이 가진 권력의 크기를 뼈저리게 의식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고 있는 일의 특성상 최고 의사결정권자들에 대한 심리분석과 상담을 많이 하는데 그런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권력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심리적 색깔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에 대한 사회적 검증이 일정 부분 끝났다는 데서 오는 자기 확신과 더불어 누구의 통제를 받는 자리에서도 이미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색깔이 드러나는 과정 중에 생기는 일에 대한 자각은,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회사 앞 마당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피력했더니 얼마 후 수영장 크기의 호수가 하나 만들어졌단다. 어느 기업 사장의 볼멘 고백이다. 어떤 사단장이 퇴근하면서 연병장이 울퉁불퉁한 것 같다고 한마디 했더니 다음날 출근길에 연병장이 다리미로 다린 것처럼 평평해져 있더란다. 밤새 수백 명의 사병들이 군화를 신고 땅을 다진 결과다. 한 재벌 기업은 총수의 분노나 스트레스가 거의 원형질 그대로 말단 직원에게까지 전달되는 의사전달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효율적인 조직구조이기도 하지만, 독이 든 술을 마셨을 때 건강한 혈관일수록 독을 온몸에 빨리 퍼뜨리는 것 같은 부작용도 있다. 리더가 자신의 권력에 대한 자의식이 아예 없거나 희박할 경우 그 폐해는 치명적이다. 일사불란한 조직의 수장일수록 자신의 권력이 갖는 영향력에 대한 자의식이 짱짱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15억이 아니라 15조의 재앙도 순식간이다. 특별한 권력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심리적 조언이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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