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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혜신칼럼] 말해줘서 고맙다

등록 2007-08-29 17:41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칼럼
부모가 다투는 소리에 잠을 깬 아이가 “엄마 아빠 싸워?” 라고 묻자 “네가 무서운 꿈을 꾼거야. 어서 자라”는 식의 대처를 반복적으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는 점차 자기 감각이 보내오는 신호를 믿을 수 없게 되어 현실감각에 장애가 생길 수 있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이가 지속적으로 정보를 왜곡할 때 나타나는 폐해다.

불행하게도, 현실세계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한민국의 법체계는 그동안 앞의 부모처럼 정보를 왜곡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니 알고 내 알고 하늘도 아는’ 명백한 사실을 외면한 채 그와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면서도 법의 준엄함이나 권위를 앞세워 국민들을 훈계했다.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이 대표적 사례다. 그런 점에서 지난주 법원의 인혁당 관련 배상 판결의 내용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미 올해 초 재심을 통해 형사법정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진 바 있지만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규정한 이번 판결은 더 철저한 자기반성과 자기교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자를 포함해 637억원에 이른다는 사상 초유의 배상액 때문이 아니다. 법원 스스로 자기 판결의 불법성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인권의 최후의 보루라고 믿었던 대법원마저 …” 라는 판결문의 일부는 사건 당시 대법원이 인권의 보루라는 본연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명확하게 지적했다는 점에서 자기고백적이다. “국가가 배상책임을 피하기 위해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구차하다”고 질타하는 대목은 통렬하다. 담배 회사가 스스로 담배의 끔찍한 해악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법원이 해냈다, 고 나는 생각한다. 단순히 사건 내용을 뒤집는 수준이 아니라, 특정 판결의 위법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동료 법관이나 법조계 선배가 민형사상의 책임을 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된다면 그 결정은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더구나 그로 말미암아 법원의 최종 판결도 잘못될 수 있다는 법질서 붕괴 상황까지 연상된다면, 어느 법관인들 한발 빼고 싶지 않겠는가.

그동안 우리의 법정신은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기보다 국가나 법 자체의 권위를 지키는 데 주력해 온 측면이 많다. ‘전쟁은 국가의 몫이지만 죽음은 개인의 몫’이라는 식의 불친절로 일관했다. 이번 판결을 통해 비로소 국가나 법의 권위에 앞서 한 개인의 존엄성과 권익을 지키는 진정한 법 정신이 구현된 셈이다.

미국에는 의사, 환자 사이 의료분쟁과 관련된 ‘아임 소리 법’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치료 이전에 예상치 못한 합병증이나 의료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의사가 환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도록 한 ‘사과법’이다. 다만, 의사의 사과가 자기 실수를 인정한 법적 증거로는 이용되지 못하도록 면책조항을 단서로 달고 있다. 일부 부작용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이런 사과가 환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의료 소송을 줄이고 있단다.

남편이 사형을 당하자 빨갱이로 몰릴까봐 아무도 자신을 만나주지 않았고 그래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살아 ‘지금은 말을 똑 부러지게 못하는 사람이 됐다’는 어느 유족의 고백은 가슴이 시리다. 인혁당 사건과 관련한 가족들의 사연 하나 하나는 통곡과 회한의 바다를 이룬다.

직업 특성상 법관들에게 ‘사과법’을 적용할 순 없겠지만, 잘못된 판결을 인정하여 이런 억울한 가슴의 대못을 뽑아주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법관들의 자기교정 능력에 박수를 보내지 그를 빌미로 법의 권위를 무시하진 않을 것이다. 이번 판결의 재판장을 맡았던 권택수 판사로 상징되는, 자기교정 능력이 남다른 법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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