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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반대편과 만나라 / 박찬수

등록 2008-06-09 20:44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아침햇발
소통의 중요성을 먼저 강조한 건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소통’과 국민이 생각하는 ‘소통’은 코드가 다른 것 같다. 소통을 하려면 귀는 크게 열고 말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 요즘 계속되는 각계 인사들과의 만남을 보면, 이 대통령은 웅크린 고슴도치와 같다. 작은 할큄에 날카로운 발톱으로 대응한다.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 얘기가 나오자 즉각 “재협상은 더 큰 문제를 불러올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대운하 문제에선 “충분히 의견 수렴해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전과 다른 게 없다. 소통의 형식을 띠었으되 내용은 마이웨이다. 이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고 난 뒤엔 더 큰 논란만 불거진다.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고 소통이 이뤄지는 건 아니다. 어느 대통령보다 국민과의 대화를 많이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소통에 실패했다. 그는 국민과의 대화를 자신의 올바름을 입증하는 자리로 활용했다. 문제를 제기하는 방청객을 풍부한 정보와 논리로 박살냈다. 국민은 귀로 듣지만 가슴으로 느낀다. 이명박 대통령에게선 그나마 노 전 대통령과 같은 말솜씨와 논리도 찾아보기 힘들다.

소통에 성공하려면 두 가지가 중요하다. 우선, 도식적인 형식을 벗어나야 한다. 청와대가 벌이는 원로들과의 대화는, 정권이 직면한 위기에 비해선 너무 상투적이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인사들을 만나고, 그 다음에 대학 총장들을 만난다. 과거 모든 정권이 ‘여론 수렴’을 말할 때마다 취했던 방식이다. 대개 서로 선을 넘지 않는 얘기를 하고, 열심히 노력하자는 선에서 끝을 맺는다. 지금의 상황은 전과는 판이하다. 학생과 주부, 회사원, 자영업자들이 스스로 청계광장에 나와 자유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에서 오가는 죽은 대화로는 살아숨쉬는 현장의 목소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 한승수 국무총리가 연세대를 찾은 게 그나마 신선했다.

형식보다 더 중요한 건 내용이다. 대통령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정치적 비판자들을 만나, 싸울 건 싸우면서도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 정치학자 하비 맨스필드(하버드대 교수)는 1980년대 미국 보수주의를 부흥시킨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성공 비결로 “보수주의자이기보다는 공화당원이었던” 점을 꼽았다. ‘이념의 틀’(doctrine)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른바 ‘레이건 혁명’의 많은 부분은 정통 보수주의를 뛰어넘었고, 민주당원들의 지지까지 얻어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지금 이 대통령은 ‘잃어버린 10년’의 틀에 갇혀 있다. 이걸 쓸어버릴 생각만 하지 그 10년의 의미와 거기서 배울 게 뭔지는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진보 정권의 흔적’을 어떻게 지울까 하는 고민은, 물론 그게 성공할 가능성도 거의 없지만, 보수 이데올로그들의 몫이지 ‘대통령 이명박’이 추구할 가치는 아니다. 촛불집회를 ‘좌파의 공세’로 파악한 시각에 휘둘려 초기 대응에 실패한 건 단적인 예다.

이 대통령에게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길 권한다. 전직 대통령을 만나는 건, ‘소통의 대상’을 자기 편을 뛰어넘어 반대편까지 넓힌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더 중요한 건 그들에게서 들을 만한 얘기가 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과 이 대통령 사이엔, 이념과 가치의 차이보다는 대통령이란 자리가 갖는 무게와 고민의 공통점이 훨씬 크다. 지금 이 대통령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여당 사람들이 아니라 전직 대통령일지 모른다. 지지 기반을 배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 갇혀선 안 된다. 그걸 뛰어넘으려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소통’은 가능해진다.

박찬수 논설위원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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