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백승종의역설
이 땅에는 고대부터 나라의 앞날을 예언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 전통을 대표하는 것이 예언서 <정감록>이다. ‘조선 왕조가 망하리니 살고 싶으면 십승지로 들어가라. 곧 정씨 진인이 나타나 계룡산 아래 새 왕조를 열리라.’ 이것이 알쏭달쏭하기만 한 정감록의 뼈대다. 조선의 지배층에게는 그야말로 혹세무민의 불온서적이었다.
정감록은 백성의 소망을 기록한 역사서로 읽을 수도 있다. 그 밑바탕에는 지금 세상이 끝나고 신천지가 개벽하기를 바라는 기대가 숨쉰다. 미륵신앙도 면면히 흐른다. 평화와 풍요에 대한 갈망이 있다. 그래서 새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움켜쥐는 심정으로 이 책을 탐독했다. 정감록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1980년대 운동권의 필독서 <찢겨진 산하>에서 저자 정경모는 김구, 여운형 그리고 장준하 세 분을 천상의 무대로 모셔다 민족의 미래를 논한다. 저자는 정감과 이심과 이연이 금강산 비로봉에 앉아 나라의 운명을 예언하는 정감록의 한 장면을 본떴다. 정경모가 정감록을 되살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민중의 처지에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염려한 나머지 정감록 특유의 화법을 차용한 것이다. 예언서는 겉으로 절망을 말할 때조차 몰래 희망의 씨앗을 감춰둔다. 정경모는 그 점을 잊지 않았다.
저항시인 김지하도 정감록에 기댔다. 민중의 마음에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시인은 정감록으로 돌아갔다. ‘앵적가’를 보라. 동학의 역사를 유장한 담시로 풀어낸 이 노래에 정감록의 문투가 살아 있다. 김지하든 정경모든 실천적 지식인들은 실의에 빠진 민중을 북돋우려고 정감록을 본받았다. 그들은 민중의 혀로 말하는 법을 배우려 했다. 그러나 이제 예언의 시대는 갔다. 엠비(MB)의 허황한 주가 예언과 달리 요즘 인터넷을 타고 번진 ‘미네르바’의 날카로운 경제 예측이 하나둘씩 현실로 증명되고 있단다. 하지만 그런 예측의 자유마저 누리지 못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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