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백승종의 역설
강이천이란 수재가 있었다. 그는 표암 강세황이라는 유명한 문인의 손자였고, 소년 시절부터 문명을 떨쳤다. 열 살쯤에 어전에서 시를 짓고 상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 수재에게도 문과시험은 무척 어려웠다. 1785년 성균관에 갓 입학한 강이천은 겨우 꼴찌를 면했다. 장원은 그보다 무려 10년 이상 선배인 정약용이 차지했다. 신참이 쟁쟁한 대선배들과 글솜씨를 겨루기가 쉬울 리 없다.
이를 악물고 학업에 정진한 끝에 그는 곧 진사시에 합격했다. 시험 성적도 차츰 나아져 1792년에 치른 책문 시험에서는 성균관 유생 전체 가운데 3등이 되었다. 문과 합격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평소 소품이라는 문체를 혐오한 정조가 문제 유생을 직접 색출하려 옷소매를 걷었다. 강이천이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그를 포함한 예닐곱 명에게는 문체 순화를 위한 특별교육령이 내렸다. 문체까지 시비하다니 정말 가혹했다.
아마도 강이천은 정조의 지시를 따르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과거시험 성적도 다시 치솟았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지기는 했지만 거의 매번 시험 성적이 대단했다. 이렇게 좋은 성적이 거듭되는 경우라면 문과 합격도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합격의 행운은 그를 비켜갔다. 1797년 강이천은 관헌에 체포되었다. 조사 결과 그동안 그가 조정이 엄금한 천주교와 정감록에 푹 빠져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체제비판을 넘어 반항과 거부로 치달았던 것이다. 결국 한 시대의 수재 강이천은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강이천의 슬픈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교육 평준화를 반대하는 부자 정부는 일제고사를 실시했다. 성적이 나쁜 학교장은 인사조처하겠다며 으름장까지 놓고 있다. 당연히 성적조작이 잇따랐다.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아무리 공부를 외쳐대도 헛일이다. 세상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요새 같으면 강이천보다 나은 수재라도 반사회, 반체제가 될 수밖에 없다.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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