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백승종의 역설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은 명산이다. 그 한 자락을 타고 내려오면 이름도 맑은 청계동이 있다. 안씨들의 터전이었다. 19세기 말, 해주 일대를 쩌렁한 음성으로 호령한 선비가 그곳에 살았다. 진사 안태훈이었다. 안 진사는 의협심이 유난히 강했고, 적극적이었다. 한 번 자신이 옳다고 믿은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기어이 이루고야 마는 고집쟁이였다.
그런 안 진사가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그러자 청계동은 물론이고 이웃 마을 사람들도 몽땅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안 진사는 거액을 기부해 교회를 세웠다. 1911년, 서울을 찾은 독일 분도회의 수도원장 노베르트 베버 신부는 청계동을 방문했다. 그는 안 진사의 사내다움에 연신 감탄했다.
1909년 10월26일, 안 진사의 큰아들 안중근은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였다. 조선 민족을 대표해 원수를 징벌한 것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다섯 달 뒤, 아들은 일본인들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죽을 때조차 그 모습이 너무도 태연하고 당당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베버 신부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1916년 독일에서 간행된 베버 신부의 여행기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에 나오는 말이다. 상대가 제아무리 악인이라 해도 살인만은 절대 안 된다.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가르침이다. 베버 신부가 이것을 모를 리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안중근 의사의 애국심과 용기 있는 행동을 기렸다. 아버지 안 진사의 용기와 의협심이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것에 감탄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인의 의기에 놀랐다.
법과 질서는 물론 신성한 종교적 가르침마저도 넘어서야 할 때가 있다. 3·1 독립운동도 민주항쟁도 촛불시위도 다 그런 경우다. 겉으로 법과 질서를 내세우며 악법만을 강요하는 이런 못된 정부에 대해서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파업도 농성도 또는 그 이상의 행위도 모두 정당하다.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