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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백승종의역설] 열녀

등록 2009-03-27 18:47수정 2009-03-27 21:10

백승종 역사학자
백승종 역사학자
백승종의역설
“17세에 결혼하여 6년이 되었으나 한시도 원통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기쁜 세월은 전혀 없었다오. 내 마음은 외로운 구름이 안개를 뿜듯, 썩고, 타고, 녹아 저 큰 강물같이 흘러내렸소.” 조선시대도 끝나갈 무렵, 김씨 부인이 남긴 유서의 한 대목이다.

김씨는 스물두 살에 과부가 되었다. 짧았던 그 결혼생활은 무덤덤했다. 양반 집안의 엄한 가풍에 눌린 탓인지 김씨 부부는 장난은커녕 농담 한 번도 주고받지 못했다. 이런 시집살이를 즐길 이가 있을 리 없다. 병약했던 신랑이 죽자, 김씨는 “눈도 감고, 귀도 먹고, 등신이 안 되어서는” 살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래도 양반댁 며느리인 김씨는 자신에게 쏟아진 눈총과 구박에 관해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는 유서에서조차 이를 함구했다.

하지만 시집의 냉대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물설고 낯선 시집에서 김씨가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목숨을 끊어버린 것은 그 때문이다. 김씨가 “좋고 좋은 이 세상”을 버려두고 꽃피고 새싹 풀풀 돋아나는 어느 봄날, 원통하다는 소리만 수백 번 되풀이하며 왜, 저승길을 떠났던가를 따져보면,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씨의 한 맺힌 죽음은 왜곡되었다. 주로 가까운 친척들이 앞장서 그 죽음을 선행으로 만들었다. 죽은 남편의 뒤를 따랐다는 것이 찬양의 구실이었고, 나라에서는 기꺼이 열녀문을 하사했다. 그 자살은 한 시대의 도덕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잣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김씨의 죽음은 결코 자살이 아니었다. 양반댁 며느리라는 사회적 자아가 죽음을 강요한 것이다. 성차별적 유교 윤리와 관습을 중시하는 양반 사회가 그를 죽이는 데 공모한 것. 한마디로 이데올로기에 의한 잔인한 살인사건이었다. 요즘 들어 자살이 부쩍 늘었다. 어린 중학생도, 어르신도, 다들 죽어 간다. 이게 모두 자살인가? 용산참사 같은 폭력사태야 말할 나위조차 없지만 대개는 가혹한 이 정권이 책임져야 할 타살이다.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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