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독일 보훔대 한국학과장 대리
백승종의역설
조선은 시험의 나라였다. 출세하는 길은 과거에 합격하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다들 과거에 매달렸다. 그 갈망을 채우려고 각종 명목의 과거시험이 생긴 결과, 조선 후기에는 각종 별시(別試)가 정규 시험인 식년시를 제치고 대세를 이뤘다. 배보다 배꼽이 커진 것이다.
별시는 당연히 특권층 자제에게 유리했다. 최근 공개된 어찰에서 정조는 벽파의 거두 심환지에게 쓰기를, 만일 그대 큰아들이 300등 안에만 들었더라도 합격시켰을 테지만 성적이 너무 나빠 부득이했다고 변명했다. 당시 1차 시험 합격자 수가 300명이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어찰이 암시하듯, 유력 가문의 자제는 1차 시험만 합격하면 따 놓은 당상인 것이 별시였다. 철종 때 수렴청정하던 조대비의 조카 조영하는 열아홉에 별시에 급제해 2년 뒤에는 성균관의 우두머리인 대사성(정3품)이 되기까지 했다. 세도가의 벼락출세란 이런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의 과거시험은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본래 취지에서 멀찌감치 벗어났다. 특히 별시는 정실 인사의 출발점이요, 양반 사회의 파당성을 심화시키는 부정적인 구실을 했다. 이웃 나라 중국에는 이러한 별시가 없었다. 과거 합격자도 전국의 수백 수천 가문에서 비교적 골고루 나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겨우 수십 개 가문이 과거를 독점했다. 부와 권세와 명망이 일부 양반에게 집중된 것이다. 이런 ‘쏠림 현상’의 주범이 바로 조선시대의 과거시험, 꼬집어 말하면 별시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특권층의 아들딸들은 특수중, 특목고를 거쳐 거뜬히 명문대학에 진학한다. 그들이 장차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독점할 것은 빤한 일이다. 이런 몹쓸 현상은 이 정부에 들어와서 몇 배 강화되었다. 정부가 내놓은 교육 정책은 돈 놓고 돈 먹기 식 불공정 거래뿐이다. 갑자기 뚱딴지처럼 밤 10시부터 학원 불을 끄겠다고 떠드는 이 몰염치는 시민을 우롱하는 싸구려 변명에 불과하다.
백승종 독일 보훔대 한국학과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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